죽음에서 돌아온 사나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2016년, 기숙사 침대에서 노트북을 통해 이 영화를 먼저 접했다. 당시엔 인문학적 소양이 지금보다 훨씬 부족했기에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나 영화 곳곳에 숨어 있는 상징에 주목하기보다는, 배우들의 연기력과 카메라 구도 등 연출적인 요소에 집중하며 감상했던 기억이 있다. 세월이 흘러 나도 조예라는 것이 깊어졌는지 다시 본 레버넌트는 예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워낙에 유명한 영화인지라 간단한 줄거리나 장면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주인공 글라스의 스토리를 통해 내가 느낀 점을 위주로 리뷰를 쓸 계획이다.
1.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글라스의 인생은 고통 그리고 고통 그리고 고통이다. 공동체의 몰살과 아내의 죽음, 사냥꾼과 길잡이로서의 고된 살아남기, 회색곰의 습격, 전신마비, 아들의 죽음, 동료의 배신, 원주민들의 공격 등등 입에 담기도 힘들 시련이 주인공을 따라다닌다. 그래도 주인공은 삶을 연명한다. 죽음이 곁에 다가온 순간마다 죽은 아내의 '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라는 음성은 시련을 극복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의 본질을 잘 나타낸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통은 존재의 시작과 동시에 필연적 요소로 평생을 함께 한다. 고통을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이자 궁극적인 방법은 자살이다. 다만 우리의 DNA는 운송체의 사멸을 바라지 않기에 두려움이라는 자살 억제 장치를 심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뇌가 고장 날 만큼의 임계치를 넘기는 고통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자연이나 타자에 의해 삶이 끝날 때까지 살아갈 수밖에 없다.
2. 우리가 삶을 숭상하는 이유.
프랑스 사냥꾼들에게 잡혀 강간을 당하는 인디언 추장의 딸, 공동체가 몰살되어 홀로 말을 타고 떠도는 인디언 사내,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을 모두 잃고 버려진 주인공. 이들은 모두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지만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악착같이 살아 남는다.
우리의 지능이 원시 영장류 수준에 머물렀다면 좋았으련만, 조상들의 식습관 변화와 뇌 용적의 증가라는 진화 양상으로 인해 인간의 지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덕분에 인간은 삶과 죽음을 단순 인지하는 단계를 넘어 그 의미를 고찰하기에 이르게 됐다.
인간에게 그 정도 지능이 주어지기 시작한 시점은 생태계 꼭대기에 군림하게 된 때와 비슷하다. 때문에 삶의 본질이 죽음에의 두려움이라는 사실은 인간에게는 수치로 느껴졌다. 인간에게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종에게 걸맞은 삶의 이유가 필요했다. 때문에 의도적으로 삶에 고귀한 가치를 부여하고 두려움보다 고상한 이유를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신과 종교는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장치들이라 할 수 있다.
3. 목표에 대한 집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능가한다.
글라스는 동료 피츠제럴드에 의해 아들을 잃고, 전신마비가 온 상태로 숲 속에 버림받는다. 꼼짝없이 죽을 처지에 처했지만, 아들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글라스는 기적처럼 몸을 움직이고 복수를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여러 번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요새로 복귀한 글라스는 피츠제럴드를 사살하러 가겠다고 선언하며 '죽음이 두렵지 않다.'라는 말을 남긴다. 그는 고통으로 가득한 삶의 본질을 경험적으로 깨우치고,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목표가 생겼기에 서슴없이 그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요소는 삶 그 자체가 아니다. 삶 그 자체는 부모의 욕망과 우연의 일치로 인해 만들어진 고통 덩어리이다. 인간은 그러한 삶에 존엄성과 같은 가치들을 부여하며 삶을 고귀한 것으로 격상시킨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삶의 부지는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못난 가치의 숭상이기에 고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충분하다. 삶의 근원인 '두려움'은 '존엄'이라는 부차적 개념 하에 더 낮은 계층으로 떠밀리고, 목표의 성취를 위해 저열한 두려움으로부터의 회피를 인해나는 자는 고통과 죽음으로 스스로를 이끈다. 그리고 비로소 그는 존엄해질 수 있으며, 여타 짐승과 자신의 차이점을 힘들이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게 된다.
유전자 운송체로서 자살을 더 고귀하게 생각하는 형질은 분명 모순적이다. 이는 종의 발생 후 대부분의 기간을 시체와 벌레, 과일 등을 가리지 않고 주워 먹던 나약한 스캐빈저로서 살았던 인간이 뇌 용적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지위 급등을 겪으며 발생한 혼선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