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만큼 맛있는 과학뉴스 한 입
여러분은 바나나 좋아하세요? 저는 제일 좋아하는 과일을 고르라면 여지없이 바나나를 고를 정도로 바나나를 좋아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로 맛이 좋고, 두 번째로는 먹기가 편해서요. 파인애플이나 두리안처럼 아무리 맛이 좋아도 먹기가 까다로우면 손이 잘 가지 않더군요.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 실제로 국내 과일시장에서 바나나의 판매량은 사과, 배 등 전통 강자들을 제치고 항상 1, 2위를 기록합니다.
전문가들은 고령화로 인해 이가 약해진 노인들의 수가 많아지자 부드러운 과일인 바나나의 판매량이 늘었다고 보기도 하고, 귀찮은 것을 제일 싫어하는 1인 가구의 증가로 인해 껍질을 슥슥 벗기면 그만인 바나나의 인기가 높아졌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한국인이 바나나를 정말 좋아하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나나를 먹을 때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셨나요? 사과나 배, 딸기, 포도 등 여타 과일을 먹을 때 우리는 과육 속에 박혀 있는 씨앗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바나나에는 눈 씻고 찾아보아도 씨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바나나의 씨앗이 너무 작아서 안 보인다거나 원래 씨가 없는 종이라서가 아닙니다. 바나나에 씨가 없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바나나 농장에서 어떻게 바나나를 생산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나나의 조상은 원래 과육에 씨가 잔뜩 박힌 모양새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편의를 위해 씨가 적은 품종을 인위적으로 개량해냈고, 지금의 씨가 없다시피 한 바나나가 만들어졌죠. 그렇다면 씨도 없는 바나나는 어떻게 농사를 지을까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기존에 자라고 있는 바나나 나무의 뿌리를 잘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면 그곳에 또 다른 바나나 나무가 자라납니다! 이런 방식을 '꺾꽂이'라고 합니다. 플라나리아나 불가사리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면 절단한 신체가 새로운 개체로 자라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뿌리를 잘라서 새롭게 자란 바나나 나무는 결국 그 모체와 유전적으로 동일한 '쌍둥이'입니다. 식물끼리의 짝짓기인 '수분'이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자가 복제를 한 것이기 때문에 개체는 분리되었지만 유전적인 변이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죠.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쌍둥이 나무들은 특정 질병에 대해 동일한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성이 없는 전염병이 한 번 돌게 되면 모든 개체들이 전멸할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바나나의 품종은 '캐번디쉬'입니다. 이 품종은 원래 생산량은 많으나 맛과 향이 별로여서 사료용으로 재배되던 품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현대인들은 맛이 없는 '캐번디쉬' 품종의 바나나를 먹고 있는 걸까요? 사실은 이러합니다. 원래 캐번디쉬 품종이 식용으로 사용되기 이전에는 '그로 미셸'이라는 훨씬 맛있는 품종이 존재했었습니다. 종종 나이 지긋하게 드신 어르신들이 요즘 바나나와 옛날 바나나는 맛이 다르다고들 하시는데,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 진짜로 바나나의 품종이 달라진 것을 알아채고 계신 겁니다. 맛이 월등히 좋은 그로 미셸은 성공가도만 걷는 듯싶더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바로 1903년에 발견된 '파나마병'이라는 바나나 전염병 때문입니다. 파나마병은 푸사륨 속 곰팡이가 물과 흙을 통해 바나나 뿌리에 감염되는 병으로, 별명이 '바나나 암'인 만큼 바나나 나무가 한 번 걸리면 폐사에 이르게 되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이었습니다. 파나마에서 최초로 발견됐기 때문에 파나마병으로 이름 붙여졌으며, 이후 이 병은 이웃국가로 삽시간에 퍼지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꺾꽂이로 재배되어 모두가 쌍둥이었던 그로 미셸 바나나는 속수무책으로 대량 폐사당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1960년부터 그로 미셸의 생산은 중단되었습니다. 이 그로 미셸의 빈자리를 채우게 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즐겨먹는 캐번디쉬 품종의 바나나입니다. 캐번디쉬는 그로 미셸에 비해 맛도, 향도 모두 뒤떨어졌지만 파나마병에 내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파나마병에 내성을 지닌 캐번디쉬 바나나 도라도 안전하다고만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로 미셸과 같이 꺾꽂이 농법으로 생산하는 이상 또다시 전염병이 휩쓸게 되면 그때는 캐번디쉬 바나나도 그로 미셸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1980년 변종 파나마병이 대만에서 발견되어, 이후 인근 중국과 호주, 인도로 퍼지며 대량 폐사를 기록한 전례가 있습니다. 언제 또 변종 바이러스로 인해 바나나가 멸종될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바나나 한 개를 까먹으며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이 맛있는 과일이 제발 지구 상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씨가 없는 개량 바나나의 특성상 인위적으로 바이러스에 내성을 가진 바나나를 개량하기는 쉽지 않다고 합니다. 언제 어떻게 우리 곁에서 자취를 감출 줄 모르는 바나나, 먹을 수 있을 때 양껏 먹어놔야겠습니다.
*처음으로 과학 칼럼을 적어봤습니다. 읽어보신 분들의 적극적인 비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