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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니체 Jun 08. 2021

아, 지루해


권태감을 순우리말로 옮길 때 가장 적절한 단어는 '지루함'이다. 표준 국어대사전에는 지루함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오래 걸리거나 같은 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따분하고 싫증이 나다.'


적절한 설명이다. 여기서 나는 '같은 상태가 오래 계속되는'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무한반복이 아닐까 싶다. 늘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나서, 늘 출근하는 시간에 출근하고, 늘 점심 먹던 시간에 점심을 먹고, 늘 퇴근하던 시간에 퇴근한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그야말로 쳇바퀴 위에 올라탄 다람쥐와 다를 게 없는 삶이다.


늘 반복되는 삶을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 반복되는 삶에는 반복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한 사이클이 가장 안정적이고, 효율적이고, 또 접근성이 가장 용이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삶의 모습을 띄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적응한 지 오래된 것에는 쉽게 지루함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감정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죄책감을 꼽고 싶다. 지루함을 다루는 글에서 뜬금없이 죄책감이 왜 나오냐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둘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경험상 지루함, 즉 권태는 필연적으로 원인 모를 죄책감을 동반한다.



쉽게 얘기하기 위해 예시를 들겠다. 당신이 아무 약속이나 잔업이 없는 주말에 침대에 누워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아주 늦은 시간에 일어나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다. 평일 동안 생각해놨던 주말 계획은 미뤄놓고 그저 지금의 편안함에 갇혀서 침대 속만 뒹굴고 있는 당신은 몸은 편하지만 마음속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편한 감정을 애써 무시한다.


여기서의 불편한 감정이 바로 죄책감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 금쪽같은 시간을 그저 의미 없는 쾌락의 제물로 바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죄책감을 느껴본 경험이 다들 한 번씩은 있다. 권태가 곧 죄책감으로 이어진 사례다. 평일 동안 열심히 쳇바퀴를 탄 우리가 주말 몇 시간을 게으르게 보냈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인류라는 종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재 지구를 정복하고 있는 인간은 불과 2백만 년 전까지만 해도 동아프리카의 흔하디 흔한 영장류 중 하나였다. 하이에나 분변 화석에서 그들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으로 그들의 생태계적 위치가 얼마나 낮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 큰 덩치, 근력, 날개도 없었던 초기 인류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 움직이며 먹이를 찾고 천적에게서 멀어지는 일이었다. 둥지에 누워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개체에게 다가오는 건 굶주림과 천적 밖에 없었으리라.


이러한 생활이 수백만 년 동안 계속되면서 게으른 개체들은 도태되고 부지런한 개체들은 자연선택을 받아 그 종자를 후손에게 물려주면서 자신의 '부지런한 유전자'를 존속시켰다. 물론 '부지런한 유전자'는 내가 임의로 명명한 이름이며, 그 존재도 불확실하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기전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이 유전자는 우리가 안락함을 지속적으로 느낄 때,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할 때(새로운 일을 하지 않을 때), 신체의 움직임이 오랜 시간 멈춰있을 때 심리적인 불편함을 유발하면서 움직임을 독려할 것이다.



만약 현대 사회가 도전하는 자에게 불리한 곳이었다면, 이러한 기전은 퇴화한 맹장만큼이나 삶을 불편하게 하는 '제거 1순위'가 되었을 터지만, 다행히도 아직 우리 사회는 도전하는 자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 이 점에서는 2백만 년 전 동아프리카 평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현재 타고 있는 쳇바퀴를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인간에게 사회는 그만큼의 보상을 해준다. 물론 이 보상이라는 게 직접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더 많은 수익과 주변의 인정 등 쉽게 인지할 수 있는 형태로 돌아오는 것은 확실하다. 과거 우리 조상 중 새로운 먹이와 터전을 발견한 개체가 무리에서 어떤 명예를 부여받았을지를 생각해보면 현대 사회도 결국 원시사회에 뿌리를 두고 발전한 형태임을 체감할 수 있다.



권태는 불필요한 감정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 몸에서 울리는 천연 알람이다. 현재의 삶이 지루하거나 하는 일이 시시할 때 우리는 새로운 도전의 타이밍임을 받아들이고 준비해야만 한다. 단순히 권태를 타파하기 위함이 아닌,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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