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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니체 Jun 10. 2021

늙음 판독기

평소 고집 세다는 소리 자주 듣는 사람은 필독하시오.


늙음의 지표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주름, 흰머리, 구부정한 허리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특징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나는 육체적인 노화가 아닌 정신적 노화를 얘기하고자 한다.


정신적으로 늙은 사람들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기존에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을 바탕으로만 사고하며,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인정하지 못하고) 본인만의 정지된 세계관 안에서만 살아가려고 한다. 끊임없는 안정을 추구하며 도전정신은 사라진 지 오래다. 특히나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나이 혹은 항렬이 낮은 사람의 의견은 그 합리성을 따지기보다는 본인의 권위를 내세워 의견을 밀어붙이는 행태를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한 번 내린 결정을 좀처럼 거두지 않는 것도 정신적 노화의 특징이다.


이러한 정신적 늙은이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심장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쌍방의 의견이 교환되고 각자의 의견에서 타협점을 찾거나 더 나은 의견으로 귀결되는 진짜 대화와는 달리 벽에 대고 말을 하는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변 사람 대부분은 정신적 늙은이들과의 대화를 꺼려한다.


이러한 특질을 한 단어로 명명하자면, '고집'이라는 단어가 제일 어울린다. 논리적인 점검 없이 단순히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아둔함을 이르는 말이다. 왜 정신적으로 늙은 사람들은 고집이 늘까?

이유는 간단하다. 나이가 듦에 따라 새로운 것을 기피하고 리스크를 짊어지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호기심은 나이와 반비례한다. 궁금한 게 넘쳤던 어린 시절과 아무리 신기한 기기도 금방 신물이 나는 지금을 비교해 보라. 달력 한 장 한 장이 무겁게 넘겨지는 건 패이는 주름과 무거워지는 관절 때문이 아니라, 날이 갈수록 뻣뻣해지는 사고력 때문이다.


사람이 기존에 알고 있거나, 향유하고 있는 행위 및 지식 외의 것들을 접할 때는 당연히 두려움을 느낀다. 문제는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느냐이다. 낯섦에서 오는 두려움을 응당한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배움과 도전을 반복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기회와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삶의 태도를 '젊음'이라고 부른다.


정신이 젊은 사람들은 항상 열려있다. 세상이 끊임없이 바뀌는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또 학습을 통해서 인지하고 느끼기 때문이다. 굳건하게 믿었던 학문적 사실이 반증되기도 하고, 정석이라고 믿었던 방법이 비효율적이라고 판명 나기도 한다. 이 사실을 항상 유념하는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언제나 틀릴 수도 있다는 태도를 지닌다.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을 비판한다고 해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권위로 찍어 누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다만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그 논리와 합리성에 근거하여 대화하려 노력하고, 더 나은 의견을 만든다. 이처럼 정신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 가능하다.


사회에서는 누가 환영받을까?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수십 년 전에나 먹혔던 경험론적 사실들을 아직까지 고수하며 타인의 비판을 절대 수용하지 않는 외골수일까? 아니면 모두의 의견을 열린 태도로 경청하고 자신의 의견이 비합리적일 경우 언제든 수정하여 더 나은 합의를 이끌어내는 젊은이일까? 이 질문에도 이를 아득바득 갈며 자신의 고집만을 내세우는 자들이라면 전자를 고를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고집을 신념이라는 더 그럴듯한 단어로 치환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고집이란 단어를 의인화하면 말이 통하지 않는 폐쇄적인 노파가 떠오르는 반면, 신념이란 단어는 성스럽고 고결한 성직자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념이란 말은 그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극단적으로는 미신과 특정 독재자에 대한 맹목적인 충정도 신념의 범위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결국 합리적인 의심과 비판이 결여된 신념은 고집보다 나을 게 없다는 말이다. 애초에 신념이든 고집이든 끊임없이 변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합리적인 비판 없이 특정 사실을 고수하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우둔함을 증명하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신체적 노화는 막을 수 없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신체능력은 떨어지기 마련이고 판단력도 흐려진다. 대략 26살 이후 모든 성장이 멈춘 인간의 삶은 '살아간다'라는 표현보다 '죽어간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신체의 모든 면에서 퇴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젊어질 수도 있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늘 해오던 일만 반복하는 30대보다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신이 알던 것을 재검토하며 사는 70대가 정신적으로는 더 젊다. 또한 앞으로의 삶이 더 긍정적으로 바뀔 가능성도 높다. 그들 주변에는 영감을 불어넣어줄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기회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만물과 사실이 바뀔 수 있음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심지어 물리학도 반증당하는 세상이다.) 우주에서 티끌만큼의 질량만을 차지하는 자신이 진리를 깨우치고 있다는 환상은 고이 접어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황소고집들이 본인만에 세상에 갇혀 있을 때 세상은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그 변화의 흐름에 올라탄 자들만이 변하는 세상에 적응한다. 때문에 계속해서 세상의 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른 사실을 접하게 되면 적극적으로 배우고 검증하는(학습하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일일신 우일신이라는 말이 이미 몇 백 년 전에 나왔는데 백 살도 안 되는 사람들이 '나 때는~' 하는 꼴은 우습게 들릴 수밖에 없다.


신체적 젊음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해서 정신까지 쭈글쭈글 해지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부디 마음만은 젊은 사람들이 많아졌음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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