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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니체 Jun 14. 2021

우리는 강해져야만 한다.

남 탓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다만, 스스로를 비참하게 할 뿐.

n포족과 혐오꾼들은 그 발생 기원이 같다. 이들은 무기력이라는 뿌리를 공유한다. n포는 무기력에 대한 저항이 자기 자신을 향한 상태이고, 타인에 대한 혐오는 그 방향이 외부로 향한 상태일 뿐이다. 어떤 방향을 선택했든 간에 무기력에 시달리는 자신의 상태가 나아지지는 않는다.


현대 사회는 가질 것이 많아진 만큼 포기해야 할 것도 많아졌다. 연애, 결혼, 출산뿐 아니라 집, 차, 취미생활, 가전기기, 옷, 음식 등 포기해야 할 카테고리의 제한이  없다는 뜻이다. 포기에 포기를 거듭하는 사람의 삶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성취에 대한 보상으로 분비되는 호르몬이나 그 수용체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는 행복하기 힘들 것이다. 행복한 척하는 자기기만은 가능할지 몰라도.


혹자는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들며 이에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법정스님은 무력함을 감추기 위해 무소유를 선택적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충만함에 여타 소유가 필요하지 않다고 느꼈기에 무소유를 행했다. 돈이 없어서, 용기가 없어서 집을  사고 사람들과 관계 맺지 못하는 무력함을 포장한 핑계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혐오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인간을 혐오하는 데에는 이성적인 이유가 성립하기 힘들다. 특히나 그 대상이 개인이 아닌 집단일 때, 혐오의 원인은 일반화의 오류와 확증편향으로 이루어진 허상인 경우가 잦다. 이성과 합리는 다양한 개체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 집단에서 그 다양성을 아울러 서로 간의 대화가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법칙이다.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는 반드시 이성과 합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혐오는 이성의 범주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감정적 동기들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특정 목적을 위해 혐오를 선동하는 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때문에 혐오는 이성과 합리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며, 혐오에 대한 대응이 이성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오히려 분노로 반응하는 아이러니 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혐오하는 사람들은 행복할까? 혐오는 논리적인 개연성이 없어도 가능하기 때문에 끝이 없이 늘어날 수도 있다. 라임이 잘 짜인 랩을 하루 종일 하기란 불가능하지만, 뜻 없는 중얼거림은 사흘 밤 낮으로도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때문에 혐오하는 이들은 자신의 우둔함을 깨우치기 전까지 혐오가 불러오는 파괴적인 감정에 휩싸인 채 분노와 피해의식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된다. 물론 본인의 무력함이 해소되거나, 사회에서의 지위가 올라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는 행복과 거리가 멀다.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며, n 포족들과 혐 오꾼 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바로 무력한 자기 자신과의 솔직한 조우이다. 우리는 '자존감이 낮다', '겸손하다' 같은 표현을 남발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그러나 이런 기전은 필터 어플로 떡칠이 된 자신의 얼굴을 진짜 자신의 얼굴이라 믿는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모든 포장지를 걷어낸 순수한 자기 자신을 맞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냥 용기가 아닌,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개인의 부족함을 위로'만' 하는 행위를 미덕으로 칭송하기 시작했다. 서점에만 가도 알맹이 없이 표면적 감정만을 잠시 달래주고, 개인의 무지와 무능력함에 대한 창의적인 핑곗거리를 제공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가 있다. 당연하게도 이런 풍토에서 자라난 세대는 무능력의 늪에서 헤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 늪에서 느끼는 압박감, 불안감, 불쾌함을 당연한 감정으로 치부하는 정도를 넘어 아름다움으로 칭송하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누군가 진실된 말로 "네가 미움받는 이유는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권리만 요구하기 때문이야. 남을 위해 희생하고 자기 것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해.", "네가 월급이 적은 이유는 남들 다 할 수 있는 쉬운 일을 하기 때문이야. 어렵고 힘든 일에 종사하거나, 리스크를 감당하고 사업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등등의 말을 한다면, 순식간에 공감능력 없는 소시오 패스로 손가락질당한다.


그러나 진정 즐거운 삶, 불안과 불쾌와 혐오가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에 마주해야 한다. 멍청하고, 게으르고, 비겁하고, 겁 많고, 의존적이며 끈기 없는 우리들의 민 낯을 말이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문제를 인식해야만 한다. 카펫 밑에 쓰레기를 숨겨놓는다고 해서 그 쓰레기들이 다른 차원을 통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본인이 스스로의 못난 현재를 부정하고, '세상이 이상해서 내가 인정받지 못해', '내가 가난하고 약한 건 000 때문이야.' 같은 자기애성 주문만을 되뇐다면 그 자에게 발전의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만약 그러한 유아기적 상태를 벗어나 스스스로의 약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문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고, 이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무(無)에서 1이 되었다는 뜻이다. 문제 파악의 다음은 해결 방법의 모색이다. 각자의 약점이 모두 다름으로, 이다음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별로 없다. 스스로의 문제점은 스스로가 제일 잘 아는 법이고, 단연 해결방법의 도출도 스스로에게 맡김이 지당하다. 문제의 직접적인 해결방법을 줄 수는 없으나, 왜 우리가 더 나아져야 하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독자분들에게 그 대답을 할 수는 있겠다.


신이 죽은 지금, 인간에게 숙명은 없다. 삶에는 생물학적 목적을 제외한 그 어떤 목표도 의미도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우연히 태어났다. 선조들이 운 좋게 생존하고 번식했기에, 더 가깝게는 우리 부모님이 우연히 서로 사랑하고 사랑의 행위를 했기에 우리가 태어났다. 혹자는 수많은 정자와 난자 중에 우리의 수정체가 된 그 정자와 난자의 조합은 엄청난 경우의 수 중에 하나라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수정된 정자는 가장 빠른 정자도 아닐뿐더러 어떤 일이 일어날 확률이 낮다고 해서 그 결과가 무조건 귀중하지도 않다.


오히려 우리는 태어남으로써 필연적인 고통들에 시달린다. 단순한 물리적 충격과 상처는 물론이고, 사람에게 상처 받고, 학습을 강요받으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몫을 다 하기 위해 엄청난 훈련과 부담에 시달리게 된다. 존재와 동시에 고통이 시작되며, 그 고통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집요하게 괴롭힌다. 재는 무존재보다 나을 게 없다. 그러나 우리는 죽을 수도 없다. 이미 삶이 주는 간헐적인 기쁨에 중독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DNA 운송체로서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자폭장치'를 누를 수 없도록 두려움이라는 안전장치를 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야 한다. 타인이나 자연이 우리의 숨을 거둬가기 전까지 말이다. 이왕 중독된 기쁨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살아야 한다. 여기서 기쁨이 쾌락과 다르다는 점을 짚고 가야 한다. 기쁨은 회의를 동반하지 않는 근원적 즐거움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 목표를 성취했을 때 오는 즐거움, 새로운 사실을 학습했을 때 오는 즐거움들이 기쁨에 속한다. 기쁨은 그 감정을 느끼기 위해 일정한 노력과 책임이 그 근저를 이룬다. 반면에 쾌락은 책임이 없는 공허한 즐거움이다. 때문에 우리의 정서적 수분을 말려 책임의 빈 공간을 메우려 한다. 마약, 술, 매춘 등을 통해 오는 즐거움이 쾌락이다. 쾌락은 태생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감정이기에 삶을 충만하게 하는 기쁨과의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


기쁨은 공짜가 아니다. 기쁨은 비싸다. 많은 책임과 노력이 뒤따르는 감정이다. 우리는 기쁨으로 삶을 채우기 위해 강인한 육체를 만들어야 한다. 정신적으로 건강해야만 하며,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이 세 가지를 충족한 사람에게는 자신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부를 축적하기 용이하며, 더 이상 남들을 미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장에서 오는 기쁨을 매우 잘 알기에 현재의 상태가 평균을 크게 상회함에도 끊임없이 발전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 보상을 받는다. 그에게는 기쁨을 최대화한다는 삶의 목표가 있다. 그 형태는 다양해도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정열적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노력하고, 성취하고, 보상받는 과정에서 일종의 서사를 만들고 느낀다. 삶이 한 편의 문학작품이 되고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생긴다. 그는 존재와 동시에 짊어지게 된 무의미한 고통을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고행으로 승화한다. 우리는 자기기만과 자기 위로 없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강해져야만 하고, 강해지길 바라야 한다. 그래야만 의미 없는 삶의 고통이 멋진 결말을 위한 서사적 요소가 될 수 있다.


약자는 기쁘지 않다. 강한 자들을 끊임없이 시기하고 두려워한다. 본인도 즐거워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기기만은 필히 공허함을 낳는다. 반면 강자는 약자를 미워하지 않는다. 좋아하거나 혹은 별 생각이 없다. 사자가 가젤을 싫어할까? 맛있는 고기를 왜 싫어하겠는가. 사자는 가젤을 좋아한다. 반면에 가젤은 사자를 혐오하고 두려워한다. 사자가 위해를 가할 수 없는 규정이 생긴다한들, 가젤이 사자에 대한 두려움을 멈출 수 있을까?


이러한 약자와 강자의 경계는 원하는 것을 위해 움직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근육을 갖고 싶다면 짐을 가야 한다. 똑똑해지고 싶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사람과 관계 맺고 싶으면 다가가야 한다. 돈을 많이 벌고 싶으면 쥐꼬리만 한 월급 주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더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하든 창업을 해야 한다. 욕구만 있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모순에 빠져 무기력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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