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에 거리를 걸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짙게 깔린 어둠 때문인지 익숙한 거리가 낮에 보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매일 걸어 다니던 골목인데도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고, 행여 누군가 따라오지는 않을까 계속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낮에는 태양이 거리 전체를 밝혀주었기에 내 눈으로 사방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빛이 사라진 밤의 거리는 모든 걸 불확실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어둠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도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그 도전이 기존에 익숙했던 것들과 거리가 멀수록 두려움은 커집니다. 내가 모르는 낯선 분야로의 도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도전을 성공적으로 이뤘을 때 내 인생이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는데도, 그 가능성은 두려움이라는 안대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합니다.
밤거리와 도전을 두려워하는 것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무지'입니다. 밤거리는 시각을 차단하여 사물과 사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로 인한 무지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장 그늘진 골목길 사이에 누가 있을지, 어두운 길바닥에 어떤 장애물이 있을지 명확히 보이지가 않으니 본인도 모르게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도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사실 잘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무지의 상태에서 미래를 상상하면 부정적인 그림만이 떠오를 뿐입니다. 사업에 도전하기도 전에 이미 실패해서 빚더미에 앉게 되는 그림을 그리고, 맘에 드는 이성에게 말도 한 번 안 붙여보고 그저 차여서 좌절하는 그림을 그립니다. 이렇게 무지에서 비롯된 두려움은 아무리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살고 있더라도 이미 명확히 알고 있는 현재에 안주하고 머무르게끔 만듭니다.
우리는 무지의 상태에서 부정적인 상상을 낳고, 그 상상을 두려워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어두운 밤거리 자체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밤거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 상상들'을 무서워하는 것이고, 도전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 이후에 일어날 수도 있는 '부정적 상상들'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실체가 없는 두려움이 우리의 뇌를 장악하고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우스운 일이죠.
이는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준 생존본능에 의한 불상사입니다. 수렵채집 시절에는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접근하여 탐구하는 것보다는, 무조건 도망가서 무리에게 돌아가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습니다. 수풀 속에 숨어있는 것이 부족 전체가 먹고도 남을 들소인지, 날 잡아먹을 사자인지 확인해보는 것보다는 일단 목숨을 부지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 사자와 호랑이는 모두 우리 속에 갇혀 있습니다. 하룻강아지는 이제 범 무서운 줄 몰라도 괜찮습니다. 과거에 우리 선조들의 목숨을 구해준 '두려움'이라는 안전장치가 현대에 이르러서는 도전과 진취적 삶을 막는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두려움이 부질없는 상상력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이제 그에 대한 해독제를 알게 됩니다. 바로 '앎'입니다. 불확실한 것을 명확히 알게 되면 그에 대한 부정적인 상상력은 뿌리째 뽑혀 사라집니다. 앎의 빛이 밝게 타오른다면 더 이상 무지의 그늘에서 두려움의 버섯이 자라는 불상사를 겪지 않아도 됩니다.
매일 다니는 거리 곳곳에 어떤 지형지물이 있는지 알게 되고, 귀신이 존재할 수 없는 과학적 이유와 논리를 인식하고 있다면 밤거리는 더 이상 무서운 악령의 소굴이 아닌 고요하고 아늑한 사색의 터전이 될 수 있습니다. 도전하려는 사업의 시장규모와 타깃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비즈니스 캔버스를 그려가며 탄탄한 준비가 선행된다면 사업의 성공 가능성과 실패 가능성을 이성적으로 유추할 수 있게 되고, 무작정 실패해서 길거리에 나앉는 그림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사업이 성공하여 인생을 바꿀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좋아하는 이성에게 말을 한마디 걸어보고, 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지 더 이상 차일 것이 두려워 벌벌 떨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무지가 빚어내는 가상의 두려움은 앎이라는 해독제로 모두 제거가 가능합니다. 두려움의 해독은 일어나지도 않을 부정적 상상들의 늪에서 여러분을 꺼내 줄 것이고, 비로소 진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기 위한 노력 자체가 통하지 않는 원초적인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와 대화할 수 없고, 또 죽어본 경험도 없기 때문에(그럴 수도 없지만) 죽음은 인류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미스터리로 남을 분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원한 무지의 영역인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긍정적 사고'로 개선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당장 죽는다고 가정해봅시다.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죽음 이후에 모든 사고가 멈추고 자아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고통스러울까요? 아닙니다. 고통을 겪고 인지할 자아가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그저 무(無)의 상태입니다. 만약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요? 그렇다면 먼저 세상을 등진 가족들과 수많은 위인들을 만나 대화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