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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진 Oct 30. 2022

⑧ 1951년 3월, 인민유격대로부터의 피해

 “내가 11살 때 음력 2월 보름날(1951.3.14.), 폭도가 집에 들어와 불을 질렀어요.”   

                 

  오빠가 사망한 후 채 3년이 되지 않아 두 번째 시련이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 할머니가 말하는 폭도는 산 쪽인 ‘인민유격대’를 말했다. 


 당시 경찰 자료(제주도경찰국, <濟州警察史>(1990), 344, 346쪽)가 남아 있고, ‘4·3은 말한다. 5권’에서도 같은 시점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다만 경찰 자료와 ‘4·3은 말한다’는 1951년 3월 22일이라고 적혀 있는데, 할머니는 이보다 8일 앞선 3월 14일로 기억하고 있다. 1951년 3월이면 인민유격대의 세력이 거의 궤멸되었을 시기라 비슷한 일이 8일 만에 다시 일어나긴 어렵다. ‘4·3은 말한다’는 경찰 자료를 기준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할머니의 기억과 경찰 자료를 다시 체크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4·3은 말한다’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편 사태가 거의 끝났을 무렵인 1951년 3월 22일 갑자기 무장대의 공격을 받아 인명이 희생되고 가옥 수십 채가 불에 타는 피해를 입었다. 이날 피습으로 법환지서 주임 조수길(趙秀吉) 경사가 숨지고, 조공윤(趙功潤) 순경이 부상을 당했다(<濟州警察史>(1990), 344, 346쪽). 또 이날 보초를 서던 강주현(康主賢, 50)이 희생됐다.'        

            

  다음은 할머니로부터 들은 내용이다.      

              

  “그 당시에는 부락이 있으면 폭도가 못 들어오게 부락마다 겹선으로 돌성을 쌓았어요. 그때 법환리는 상부락, 중부락, 하부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내가 살았던 ‘상부락’ 북쪽으로 폭도들이 들어와서 막 불을 질렀죠. 그 불에 타는 소 울음소리 개 울음소리 돼지 울음소리 그 소리에 어린 가슴이 벌벌벌 떨었어요. 나중에 이 얘기를 A4 20매에 다 적었어요. 내가 육십다섯 살 넘어서, 제주시 불교대학 OO기 졸업할 때였는데, 졸업용으로 부처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적으라고 했어요. 무얼 적을까 하다가 적은 거예요. 처음에 적었을 때 20매는 너무 많아서 8매로 줄여서 제출했는데 대상을 받았지. 원래 최하 3장을 내라고 했거든. 담 넘어가다 신발 잃어버려서 나 신발 찾던 거, 나가 울고불고한 거, 개 울음소리 소 울음소리 난 거 적어서 대상 받은 거예요.”          

  집에서 기르던 가축들이 산 채로 태워졌다고 했다. 열 살 때 겪은 일을 55년이 넘어서까지도 생생히 기억하다가 글로 적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고 하셨다. 8일이라는 날짜상의 차이가 나지만 할머니의 기억과 표정은 무척 생생했다.                    


  “그 당시에는 밭에서 일하면, 부락에서 몇 시까지 빨리 안 오면 성문을 닫아버렸어요. 남한산성 북한산성 그런 식으로 겹성으로 해가지고 문을 닫아버리면 못 들어오는 거예요. 그렇게 해가 저물어 가면 한라산에 있던 폭도들이 다 내려왔어요.”        


  당시에 마을 주민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성을 쌓았다. 지금도 곳곳에 그 당시 쌓았던 성터가 남아 있다.                    

  “성 지키는 건 개인들, 처녀들이었어요. 남자들은 다 죽었어요. 대동청년단들은 성을 안 지켜줬어요. 성 지켜주기는커녕 와가지고 백성들 얼마나 괴롭혔는지, 말도 못 하게 괴롭혔어요. 베이지색 모자, 똑같은 모자들 쓰고 와가지고 서북청년이라고 했어요. 그 당시에는 얼마나 못살게 굴었다고 사람들을, 그 사람들 다 폭도들이야.”                    


  50년대 초 들어서 미군이 찍어 놓은 성 지키는 사진들이 다소 남아 있는데 할머니의 말씀대로 모두 젊은 여성들이 지키고 있는 모습만 찍혀 있다. 11살 소녀였던 할머니의 눈에도 그 여성들의 고난이 보였던 것이다.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말을 할 때는 더 자세히 말하지 못하고 여러 번 괴롭혔다는 말로 말을 이어가셨다.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서북청년단이나 대동청년단의 악행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표적이 되었다. 법환리는 서귀포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바로 옆도 아니다. 할머니는 그 얘기도 해주었다.       


  “서귀포에 폭도들이 들어와 가지고 막, ‘솔동산’에 폭도들이 들어왔어요. 그 당시에는 솔동산이 서귀포에서 제일 번화한 곳이었지. 솔동산에 불을 붙여가지고 그 연기가 법환리에서 다 보여. 어머니는 폭도들이 다 저렇게 내려와가지고 사람들 다 죽이고 집에다 불 붙이는데 쌀밥이라도 해 먹자 그러시더라고. 그때는 나락(쌀)이 나와도 팔아서 돈 벌려고 보리밥만 먹었는데 그 뒤로 매~앤 쌀밥만 먹었어요. 폭도들이 불 지르는 거 보니까 놀라 자빠져가지고…”       

             

  4·3 기간을 겪으며 비록 할머니의 오빠는 희생을 당했지만, 부모님은 4·3을 잘 넘겨오셨다고 했다. 그런데 나락(쌀)으로, 즉 쌀로 밥을 지어먹었다는 이야기가 특이했다. 2022년 현재 제주도에서 쌀이 나는 곳은 ‘하논’이라는 법환리 부근의 분화구 지형으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하논에서도 오직 한 가구에서만 쌀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쌀로 지은 밥을 ‘곤밥’ 즉 ‘흰색으로 곱디고운 밥’이라고 했다. 그런데 쌀은 주로 전라남도 지방에서 배로 들여온다고 알고 있었기에 나는 할머니에게 이에 대해 질문했다. 그리고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쌀농사를 지은 건 하논에서가 아니고 강정들에 가다 보면 큰 내도 있고 작은 내도 있어요. 내 이쪽에 논이 있어 놨어요.”      

              

  법환 기준으로 강정을 향해 가다 보면 순서대로 악근천, 도순천이 있는데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제주도 산남 지방에서는 논농사를 짓는 곳이 간혹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쌀농사보다는 귤농사가 수익 창출 면에서 월등히 좋아 많은 논이 귤밭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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