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한테는 꿘(權)이 없어요.”
이야기는 4·3 이후로 흐르고 있었다.
“거기 우리 논을 지금은 남이 빌려서 살고 있어. 지금은 귤밭으로 쓰고 있더라고요. 오빠가 죽어서 이제 대가 끊어져서 양자를 데려와가지고, 우리 집 전 재산을 양자한테 다 물려줬어요. 여자한테는 꿘(權)이 없어요. 아버지가 너희들은 시집가버리면 출가외인인데 왜 이 재산을 먹냐고 하셨지요.”
제주도 4·3 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양자를 들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재산상속에 있어 피상속인이 사망한 후에 들이는 ‘사후양자’(상속무효)로 후에 와서 시끄러워지기도 한다. 할머니의 말대로 양자한테 전 재산을 물려줬다면 현행 민법 제1112조 제1호 ‘피상속인의 직계비속은 그 법정상속분의 2분의 1’ 규정에 따라 양자에게 유류분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다만 할머니가 그것을 원할지는 잘 모르겠다.
“양자가 지금 엄청 잘되고 있어요. 그 터에 ‘세또까 밀감’(2000년대 초반부터 제주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외래 밀감. 제주향, 탐라향, 백록향 등으로 불리다가 2021년 현재는 ‘천혜향’으로 이름이 통일됨-한국농어민신문)을 해가지고. 법환리 서쪽에 상가 짓고 남 빌려줬어. 자기네 사는데도 우리 사는 도당집 다 뜯어가지고 새로 집을 지어서 지금 잘 살고 있어요. 그 조카들이 관청에 근무하고 아주 대단해요. 양자는 원래 ‘양’씨예요, 멀리 양 씨. 우리 4촌들은 다 화태, 오사카 가 가지고 죽어버렸으니까 양자 들일 수밖에, 4촌들은 외국 나가서 나이 들어서 다 죽었어요.”
‘양자’는 할머니에게 있어 법적으로 남매가 되겠지만 할머니는 남 얘기하듯 말씀하셨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할머니 집안이 꽤 부유한 집안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해당 상가건물을 찾아가 본 적이 있는데 부근에서 가장 높은 상가건물이었다. 할머니의 오빠가 4·3 때 죽지 않았다면 할머니가 지금처럼 동굴 속에서 살았을까. 혹은 할머니 오빠가 죽었더라도 할머니 역시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할머니가 여자였기 때문에 4·3 때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았기에 죽은 자들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았다. 앞서 할머니에게는 일본 가서 일본 남자와 결혼했다는 딸 이야기를 들었는데 문득 할머니의 자녀들이 궁금해졌다.
“충청도 주지 스님이 날 더러 결혼하지 말라고 했어요, 10살도 안 됐을 때.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너는 60 갑자만 배워서 절 생활을 하라고 했지요. 나는 다 필요 없고 절 생활도 필요 없고 학교 공부가 하고 싶다고 했지. 그 당시 60 갑자 안 배우고 결혼하고 4남매를 낳고 나니 부부지간에 불화가 생겼어요. 그러면서 내가 너무 많이 아파지기 시작했어요. 보다 못한 아버지가 절에 가 수양을 하라고 했어요. 당시 체중이 38kg까지 내려갔으니 말 다 했지. 그래서 부산에 있는 금강사라는 절에서 수양했어요. 애들도 제주도에 놓고 가서 10년을 살았네.”
할머니가 말하는 60갑 자라는 것은 ‘사주팔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나도 사주팔자를 공부해온 바가 있어 먼저 나의 사주를 풀어 할머니에게 설명해 드렸다. 내가 과연 잘 보고 있는 건지 몇 가지 질문을 해 보니 할머니가 나를 신통하게 보셨다. 충청도 스님과 할머니의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는 사주풀이에 정통하신 분들로 보였다. 할머니는 금강사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60 갑자를 그리 제대로 배우진 않았다고 했다.
“금강사에 들어가 절 창고를 맡았어요. 그저 절 부엌에서 밥하고 설거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창고 열쇠를 딱 쥐고 있었지. 그러다가 절에서 문서를 다루게 됐어요. 절에서는 60 갑자를 모르면 축원도 못 쓰고 아무것도 못 해요. 책력(만세력)에 다 있는 걸 볼 줄 모르니 답답해서 그날로 왕복 비행기 표를 끊어서 아버지에게 와서 60갑을 배웠어요. 당일로 부산으로 다시 돌아가야 해서 아버지가 60갑을 적어주셨어요. 내가 비행기 시간 때문에 적어준 것만 가지고 가겠습니다, 하니까 아버지가, 너 이거 가서 30분에 못 외우면, 하루에 못 외우면 머리가 멍텅구리가 되어가지고 요곳이 요곳 같아서 못 외운다, 하시면서 바로 외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하루 만에 다 외우니 축원도 써지고, 그때부터 축원을 적게 되었지요. 아버지는 60갑을 거꾸로도 외울 줄 아셨어요.”
할머니의 남편과 자식들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 할머니의 삶도 범상치 않았다. 결혼하지 말라던 충청도 스님 말을 안 듣고 결혼해서 죽을뻔한 고비를 넘기고 나니 60갑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고 하셨다.
“남편은 당신이 73세에 돌아갔어요(몇 년생인지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모름). 남편도 나처럼 제주도 사람. 육지에 OO대 국어과 졸업하고 중학 교감 자격증을 취득했지. 그런데 남편은 초등학생을 좋아해서 초등학교로 발령받았어요. 경상북도 영덕 축산항으로, 옥계로, 옥산으로 애기들 데리고 다니면서 고생도 많이 했어요. 그게 다 벌써 60년 전 얘기야. 제주도 사람들은 물허벅을 머리에 이지 못하거든. 그래서 경상북도에 있을 때 학생들, 5학년 애들이 많이 물도 길어주고 도와줬어요.”
남편은 그렇게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다가 정년퇴임 후에 할머니의 아버지가 주지 스님으로 있던 절의 주지 스님이 되셨다고 한다. 남편이 돌아가시고는 할머니의 첫째 아들이 지금의 주지 스님으로 있고, 둘째와 셋째 아들은 제주시 쪽에 산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뭐 필요한 것 있으면, 버스 타고 서귀포시에 내려가서 다 사 와요. 요 밑에 있는 주지 스님은 이제 주지 스님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내가 그분한테 그런 거 시킬 수는 없지.”
큰아들을 ‘그분’이라고 하시는 할머니의 표현이 무겁게 다가왔다. 절절한 할머니 이야기의 끝이 있을까만은, 우리는 여기서 이야기를 마쳤다.
겨울의 한라산은 해가 일찍 진다. 굴 밖을 나서고 보니 굴 안이 굴 밖보다 오히려 밝아져 있었다. 할머니는 OO병원에 정기검진 예정이 있다며 이야기를 끝내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이것이 제주도 깊은 숲속 동굴에서 4·3을 겪고 나서 음양오행을 공부하며 부처님을 모시는 할머니를 만나게 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