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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진 Oct 30. 2022

⑤ 친정아버지, 그리고 소개(疏開)로 시작된 사건

  “친정아버지는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상효’에 있는 절 뒤로 자그마한 법당에다 불상을 모셔 놓았어요. 그 당시 아버지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법화사에서 신도 회장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법화사의 주지 스님이 충청도 분이셨더랬죠. 아직 4·3이 시작되기 전인 제가 6살 때(1945년)부터 법화사의 주지 스님이 저에게 목탁 치는 법이라든지 법문 읽는 방법 같은 불교와 관련된 것들을 가르쳐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어머니 치맛자락 붙잡고 절에 가서 배우기 시작한 거예요. 그 당시 친정아버지는 60 갑자를 외워서 택일도 하고 사주도 볼 줄 알았어요.”     


  할머니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4·3 때 중산간(해안에서 5km 이외의 지역. 제주도에서는 해발 300m 이상 지역을 중산간이라고 부르는데 ‘상효’는 중산간임)이 위험해지니까 ‘법환리’로 내려갔지요. 친정아버지는 거기서도 ‘법화사’에 계속 신도로 다니셨어요. 친정아버지가 하는 말이 그 당시에 제주도에 절이라고는 원당사와 법화사밖에 없다 하시곤 했어요. 원래 법화사가 아주 큰 절이었는데 몽골 군대가 와서 불태웠대요. 4·3 당시에는 법화사가 한 칸짜리 조그마한 절(안도월 선사가 지은 포교소)이었는데 제주도에 스님이란 스님은 전부 원당사(제주도 북쪽 삼양동에 있는 절. 원나라 시절, 즉 고려 시대에 지어진 절로 해안과 가까움) 아니면 법화사로 피신을 왔지요. 그러니 법화사 주지 스님 말씀이 사람이 너무 많아 못 살겠다, 법환리 어딘가에 부처님 모실 공간만 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아버지가 원래 사시던 ‘상효’ 쪽 법당을 가르쳐 드렸죠. 친정아버지 권유에 따라 주지 스님은 흰 무명천으로 법화사에 있던 불상을 싸서 등에 지고 와 아까 얘기했던 우리 작은 시아버지 영정 모셔 놓은 절, 그 절 부근 초가집에 불상을 모셔 놓고 지낸 거예요.”     


  할머니가 전해준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사실관계를 따져보기로 하겠다.   

  

  “4·3이 끝나고 나중에 친정아버지가 집집마다 ‘권선’을 해서 그 초가집을 뜯고 절 식으로 도당을 지었죠. 한쪽에는 요사채도 만들었어요. 그것이 아까 얘기했던 영정들을 모셔 놓은 절의 시작이에요.”     


  산에 숨어 있던 ‘인민유격대’는 절을 자신들의 아지트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4·3 시기를 지나면서 대부분 산속의 절들은 군인과 경찰에 의해 불태워졌고, 2021년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절들은 모두 4·3 시기가 끝난 이후 1950년대 중반 이후에 재건된 절들이다. 내가 할머니를 만난 동굴 안에도 할머니는 불상을 모시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선대부터 독실한 불교 집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할머니를 한 번 더 뵙고 알게 된 것이지만 충청도 스님이 입적한 후 친정아버지가 이 절의 주지 스님이 되었고, 그 뒤엔 할머니의 남편이, 그리고 남편이 사망한 후 지금은 할머니의 큰아들이 이 절의 주지 스님으로 있다. 제주도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당 오백, 절 오백’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제주도에는 샤머니즘의 성격을 띤 ‘당’과 불교의 ‘절’이 곳곳에 많다는 얘기다. 그중 절은 특히 4·3 시기를 거치면서 불타버린 경우가 많은데 특이하게도 할머니와 인연 있는 이 절은 4·3 시기에 창건이 된 경우이다. 


  여기서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법화사는 할머니의 기억과 다르다는 점을 짚어보겠다. 840년 해상왕 장보고에 의해 완도에 지어진 법화사와 함께 제주도 한라산 남쪽에 지어진 법화사는 원나라 시기에 오히려 더욱 번영하였으며, 1408년 조선 초기까지도 법화사에 소속된 노비만 230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쇠락을 거듭하여 15세기 말경에 폐당되었다(제주특별자치도 문화과 2019년 설명 <新增東國輿地膀覽(신증동국여지승람)>, <탐라지> ).


  다음은 제주불교신문 기사이다.


  '1920년대 후반 안도월선사(安道月禪師)가 유서 깊은 법화사 터에 포교소를 창건하게 된다. 그러나 1948년 4·3 당시 중산간 일대의 소개령으로 포교소도 불에 타고 말았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모슬포에 훈련소가 세워지면서 이곳은 군 숙영 장소로 이용되었다(제주불교신문, 2014.9.21).'


  제주대 문학박사 한금순의 <안도월과 근대 제주불교> (大覺思想 제26집, 2016.12. pp. 321-355.)를 보면 안도월은 제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승려로 1936년에 입적했다고 나온다. 할머니는 1940년생이므로 할머니가 말하는 충청도 출신의 법화사 주지 스님이 누구였는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법화사 포교소에 있던 주지 스님은 포교소가 불타기 전, 그러니까 1948년에 ‘상효’에 있는 절로 옮겨갔고 그해 여름 할머니는 겪어선 안 될 일을 겪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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