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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진 Oct 30. 2022

⑥ 어멍펜, 오라방 [외가 쪽, 친오빠] 그리고 광복

 “애기 밑으로 내려 노라. 애기 넋 난다.”          


  할머니의 어머니가 할머니의 오빠에게 한 말이다. 할머니와 헤어지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할머니의 어머니 쪽 가족(어멍펜) 이야기를 별로 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가 쪽 이야기는 엄마와 이모 한 분이 전부인데 이나마도 순전히 할머니의 오빠 이야기를 하면서 부수적으로 나온 것에 불과했다. 할머니의 형제자매로는 1922년생 오빠가 유일했다. 할머니가 1941년생이니 두 사람은 19살이나 차이가 나는 셈이다.                     

  “그 당시에는 초등학교 4학년이 끝이었어요(초등학교라 표현하심). 오빠는 서귀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고등학교는 일본 ‘동경’ 가서 졸업했지요. 이모가 동경에 계셔서 오빠가 거기서 공부할 수 있었어요. 동경에 있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대요. 그러다가 1945년 광복을 해서 24살 때 다시 법환리로 돌아온 거예요. 그때 나는 5살 내복만 입고 겨우 아장아장 걷고 있었는데 오빠가 와서는 귀엽다며 한 손으로 나를 들어 올려 무서웠던 것이 기억나요. 오빠가 나를 그렇게 아꼈어요. 동경서 오빠가 오던 날, 내가 내복만 입고 아장아장 걸어오니까 오빠가 오면서 ‘아이고 누이동생!’ 하면서 한쪽 손으로 내복을 잡아 높이 들어 올렸어요. 어린 애기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얼마나 높아, 무서워서 엄마 엄마 하며 우니까, 엄마가 ‘애기 밑으로 내려 노라. 애기 넋 난다.’”             

       

  오빠 이야기를 하는 내내 할머니는 깊이 감정이입을 하셨다. 전과 달리 말하는 속도가 무척 빨라졌고 그에 맞춰 할머니의 표정 변화도 짙어졌다. 제주도에서는 깜짝 놀라면 '넋이 나간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럴 때면 동네 무당에게 가서 ‘넋드림’이라는 간단한 굿을 하기도 한다. 제주도 사람들은,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3개의 넋이 있다고 믿기에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는 ‘시왕맞이 굿’에서 이 3개의 넋을 불러 달랬다가 ‘미여지벵뒤’라는 이승과 저승의 중간에 보낸 후 마지막으로 저승에 보내는 굿을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오빠가 달구지에 한~달구지로 책, 공부하던 책들을 가지고 돌아왔어요. 일본 책상이 아주 근사했던 기억이 나요. 오빠 노트를 보면 하얀 백지 골령 그어진 소곱에[줄줄이 그어진 선에], 햇빛에 비춰보면 그림이 하얀 백지 위에 탁 나오고 어두운 곳에 두면 그냥 백지였어요. 해방 후 우리 연필은 연필도 아니었지요. 깎으려고 하면 푸석푸석 부서졌어요. 일본 연필은 너무 좋고, 일본어 교과서도 그림도 좋고 칼라로 멋있게 그림이 있었어요. 해방되고 보니 연필도 없고 노트도 없고, 당시에는 ‘흙종이’[요즘은 백노지]를 사서 이십몇 절지로 잘라 바늘로 꿰매서 노트로 썼지요.”     

               

  해방 직후 일본으로부터 공산품을 공급받던 제주도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자잘한 모든 것들의 품귀현상을 겪게 되면서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배를 가진 몇몇 사람들은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물건을 제주도로 들여오기도 했다. 당시 이런 화물을 수입해 오던 배를 경찰이 단속하는 과정에서 소위 ‘모리 행위’가 자행되었고, 특히 ‘복시환 사건’ 같은 경우 ‘수입’을 ‘밀수’라고 우기며 경찰은 그 배까지 빼앗고 배에 실려 있던 화물을 착복했다.                     


  아래는 제주일보 2018년 3월 20일 기사이다.          


  '<복시환 사건>은 일제강점기부터 제주와 일본을 오가던 30t급 화물선인 복시환(福市丸)이 1947년 1월 11일 성산포 근해에서 밀수선으로 오인당해 목포 해안경비대에 나포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복시환은 오사카에 사는 서귀포 법환리 출신 재일교포들이 고향에 전기를 가설하기 위해 준비한 자재와 학용품을 비롯한 생활용품을 싣고 서귀포로 귀항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 화물의 처분을 둘러싸고 모리배들이 개입했고, 군정 관리까지 뇌물을 받고 관여하면서 사건이 확산됐다. 비리에 연루된 신우균 당시 제주감찰청장이 직위 해제됐다. 미군정 법무관 패드리치 대위는 배후 비호 인물로 지목됐다. 이 사건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충청남·북도에서 각 50명씩 100여 명의 경찰 병력이 제주도에 파견됐다. 다른 지방에서 온 경찰은 도립병원 앞에서 열린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 참석한 제주도민을 향해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도민들이 미군정과 경찰을 불신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으며, 4·3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4·3 사건을 단순히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이 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이라고 알면 안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이런 경찰의 모리 행위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할머니의 증언은 그래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오빠는 해방 후 동경에서 돌아와서 서울신문을 받아봤어요. 그때는 제주도에 신문이 없었지요. 어느 날 내가 학교 다녀와서 보니, 어머니가 그 신문으로 천정이든 어디든 도배를 해 놔서 집이 훤해졌어요. 어머니가 학교 갈 때만 입는 옷은 기다란 왕대에 따로 걸어놓으라고 했어요. 그래서 학교 다녀와서 옷을 왕대에 걸어놓으려고 하니 하필 내 눈앞에 있던 신문에 아주 짤막하게 ‘시’ 같은 것이 적혀 있었지요. 그 내용은 ‘오늘은 삼월 삼짓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 해방의 첫 기쁨을 알고 갔거니, 흥부집 박 씨들 얼마나 물어왔나. 산마슬 강마슬 집집이 뿌려신거. 금은 보배 갖은 옷 온갖 문화 등이 쏟아지라.’인데, 지금까지도 몇십 년이야, 지금도 안 잊어요. 1947년 아니면 1948년도일 거예요.”                  

  

  할머니는 이외에도 초등학교 교과서를 줄줄 외우는 등 기억력이 뛰어나셨다. 동굴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할머니의 기억력이 뛰어나다기보다는, 여전히 할머니는 그 시절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점점 더 빨라지고 활기차 졌다.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진 내 눈은 할머니의 웃음 가득한 표정을 더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다음은 오빠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오빠가 교편생활도 조금 했어요. 법환리에서 했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한 책상에 남자 여자 나눠서 공부했을 때였어요. 옆에 남학생이 ‘너희 오빠 들어온다. 들어온다.’ 이러면서 나를 찝딱찝닥 건드려. 나는 일본 연필에 면도(연필 깎는 칼)도 있었어. 일본 계수 고무 너무 좋아, 너~무 좋아. 우리나라는 계수고무 만들 생각도 못 할 때야. 자꾸 뭐 빌려줘라 빌려줘라 하다가 안 빌려주면 그 남학생이 나를 발로 툭툭 차요. 그러면 ‘오빠! 얘가 나를 막 괴롭혀요, 괴롭혀요!’ 하면 오빠가 둘 다 나오라고 해서 둘을 똑같이 나무랐어요.”        


  할머니의 오빠가 일본에서 가져온 물건들에 대한 자부심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할머니의 오빠 자랑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한 번은 학교에서 쥐에 대한 작문을 시킨 적이 있어요. ‘오빠, 강 선생님이 작문을 내줬는데 나는 작문이 뭔지도 몰라.’ 그랬더니 ‘내가 가르쳐줘서 적으면 그게 작문이냐, 그걸 너대로 터득해서 적어야 작문이지.’ 그래서 ‘오빠, 나 이거 안 적어줘도 돼. 나대로 적어갈게.’ 그렇게 해서 대상을 받았어요. 그러니 오빠가 ‘어이고, 한몫한다이.’ 그랬죠. ‘양 선생 누이동생, 양 선생 누이동생.’ 그러면서 선생님들이 나를 많이 아껴주고 그랬어요. 근데 그런 오빠가 돌아가니까 이제는…”          

          

  갑자기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하는 할머니를 보고 나는 무척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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