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한 후에 잡혀갔어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할머니의 감정은 추락하고 있었다.
“우리 오빠는 동경에서 유학하고 제주 와서 판사 시험을 보려고 했어요. 3일 후에 서울에 올라가 시험 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 폭도들이 와서 오빨 잡아가지고 어디에서 죽였는지 몰라요. 그때 마을에서 영특한 사람들만 골라서 엄청 많이 죽였어요. 경찰이 북한하고 한 속, 단짝이라서. 여기서 경찰 하면서 실상 내용은 북한 쪽이었어요. 법환리에서 몇 사람 죽었는데 모두 영특한 사람들이었어. 내가 직접 오빠 잡혀가는 걸 보진 못했어요.”
경찰이 마을에 와 오빠를 잡아갔다는 내용이다. 당시 경찰은 좌익혐의자를 색출해 내는 작업을 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우익 쪽 사람들을 공격했다는 증언이 많이 나오는데 할머니도 그와 비슷하게 이야기를 하셨다. 아마 그래서 경찰이 북한 쪽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폭도들이 와서 잡아갔어. 폭도들이 경찰관이야, 경찰관이 와서 잡아갔지, 경찰관도 폭도야.”
산사람(인민유격대), 군인, 경찰 모두 포함해서 폭도라고 부르는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당시 중산간 지역 사람들은 낮에는 경찰이나 군인에 의해, 밤에는 인민유격대에 의해 양쪽으로부터 희생을 당했다. 처음에 할머니 말씀을 들었을 때는 명확하게 경찰이라고 안 하고 양쪽을 합쳐 폭도라고 하셔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7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할머니에게는 그 모두가 여전히 ‘폭도’였다.
“몇 년 몇 월 며칠 이런 거는 몰라요. 오빠 죽은 날을 모르니 잡혀 나간 날로 제사를 지내는데 여름이에요. 제주 4·3 평화재단, 행불인 묘역에 있는 ‘독비’에 적혀 있어요.”
할머니의 눈물은 그치질 않았다. 점점 더 대화를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오빠 제사 때 내가 그 ‘독비’에 가서 시를 적어서, 읽으면 눈물이 앞을 가려요. 45주년 탑동 위령제부터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올해(2020년)가 72회예요. 제주시 시의회에서 행불인 신청 하라고 할 때도 내가 직접 가서 신청했어요. 오빠가 행불자로 그때 등재된 거예요. 오빠는 행불이 돼서 군사재판을 받았는지 어쨌는지 모릅니다. 혹시라도 우리 오빠 찾으면 알려주세요.”
할머니의 오빠 이름은 ‘양OO(梁OO)’이다. 다음은 ‘4·3은 말한다. 5권’의 법환리 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마을에서 토벌대에게 끌려가 죽은 이로는 이OO(李OO, 37)와 양OO(梁OO, 27) 등이 거론된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무고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한 주민은 “이OO 씨는 아주 성품이 좋은 사람이었고 우리와 함께 성담도 쌓으러 다녔다.”면서 “서북청년단이 갑자기 끌고 가 처형했다.”라고 말했다. 양OO은 당시 활동이 여의치 못한 결핵 환자였으나 일본에 유학하다 돌아올 때 가져온 책이 토벌대의 눈에 소위 ‘좌익 서적’으로 걸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 이OO(64, 서귀포시 법환동)의 증언”
위 내용을 확인한 뒤 나중에 다시 할머니를 찾아가 이 내용을 알려드렸다.
“이OO은 저도 아는 사람인데 당시 나이가 어려서 정확히 잘 모를 거예요. 우리 오빠는 결핵 환자가 아니었어요. 건강한 사람이었어요.”
할머니의 증언과 이OO의 증언이 엇갈리는 가운데 오빠인 양OO이라는 인물이 몹시 궁금해졌다. 그가 결핵 환자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경찰에게 끌려가 처형당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경찰을 구성했던 사람들은 여러 부류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서북청년단’이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고난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