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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진 Oct 30. 2022

④ 樺太화태/ からふと가라후토/ Сахалин사할린


  “큰아버지는 마을 훈장이셨어요. 큰아버지와 셋아버지는 화태(樺太)에 가서 돌아오지 못했지요. 지금도 그 두 분 무덤이 모두 ‘화태’에 있어요.”     


  제주에서는 보통 아들을 셋을 낳았다. 아들을 낳다 보니 딸들이 생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역마다 아들의 순서를 가리키는 표현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큰아들 - 셋(섯)아들 – 족은(말젯,말잣;末弟)아들”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할머니의 표현대로 ‘큰아버지’, ‘셋아버지’라고 한다면 친아버지는 이 두 아버지를 제외한, 삼 형제 중 막내가 된다. ‘둘째’라고 하지 않고 ‘셋(섯)’이라고 하는 것은 제주도 말로 ‘셋(섯)은 ‘사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섯고모’라고 하면, 그 집엔 딸이 셋 있는 것이고, 섯고모는 둘째 고모를 가리킨다. 물론 아들이 넷, 다섯 그 이상일 경우에도 따로 부르는 용어가 있다. 아들이 넷이면 ‘큰 - 셋 - 말젯 – 족은’이 된다. 반대로 아들이 하나만 있으면 ‘웨아들’이라고 한다. 


  화태(樺太)라는 곳은 역사적으로 손바뀜이 심한 곳이다. 지금은 러시아 땅이지만 일본은 계속해서 자신의 영토이니 돌려달라고 하는 곳이기도 하다. 쓰기는 화태(樺太)라 쓰고, 일본어로는 ‘からふと’(가라후토)라 읽고, 러시아에서는 ‘Сахалин’(사할린)이라 부른다. 물론 현재는 사할린이라고 해야 맞고 화태나 가라후토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이것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읽는 것과 같은 오류이다. 짧게 이곳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협정’에 의해 사할린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사할린의 남쪽(북위 50도선 이남)을 점령하고 이곳을 화태 즉, 가라후토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1918년에 일어난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련연방이 새로 생기는 틈을 이용해 일본은 사할린 전체를 점령하고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 그러다가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화태라는 지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러시아 영토로서 사할린이라고 불린다. 


  지금도 ‘화태’ 시절에 이 섬으로 들어갔던 조선인은 사할린섬 남쪽에 대를 이어 거주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화태에 들어간 조선인들은 모두 강제 징용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조선의 남쪽에서 징용되어 사할린까지 끌려간 이들 조선인은 일본 패망 이후 일본 본토로 돌아오지 못한 채 사할린에 남겨졌다. 이후 소련이 대한민국의 적성 국가가 되면서 사할린에 남겨진 조선 남쪽의 사람들은 대한민국으로 돌아올 길이 막혔다. 그래서 일부는 북한으로 갔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대한민국과 러시아가 국교를 맺을 때(1990년 9월)까지 고향인 대한민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사할린에 있게 되었다. 그 조선인 중에 할머니의 4촌 언니, 오빠들과 그 자식들도 있다.  

   

  “친정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하필 ‘일포날’(시신을 매장하기 전날)에 큰아버지랑 셋아버지 손주들(사할린 3세대, 할머니의 5촌 조카들)이 제주도에 왔어요. 참 신기하기도 하지. 족은(작은) 할아버지 돌아가실 걸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4촌 언니와 손주들 상복을 급히 만들어서 장례식 치르고, 며칠 더 제주에 머물다 갔어요. 내 조카들이 러시아말밖에 못 해서 제주도에 돌아올 생각은 없다고 하더라고. 너무 늦게 온 거지, 너무 늦게 온 거야. 4촌 오빠의 아들 조카(큰아버지의 아들의 아들, 할머니 집안의 장손)한테만 내가 15만 원을 줬어요. 러시아의 4촌 언니는 나라에서 일산에 아파트를 마련해줬어요. 내 언니들이야 우리말 다 할 줄 아니까, 거기와 살다 죽었지. 그 조카들도 또 러시아에서 아이들을 많이 낳았어요. 그 아이들은 뭐 이제 제주도 올 일 있을까나.”     


  조카들은 진짜 러시아 말밖에 못 해서 대한민국에 안 오는 것일까? 대한민국 정부는 사할린에 남겨진 동포들에 대해 여러 가지 지원정책을 펴 왔지만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에 끌려갔거나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에 대해서만 지원해 왔다. 따라서 1941년생인 할머니의 4촌 언니들은 광복 이전에 사할린에 끌려갔기 때문에 정부 지원 대상이 되지만, 4촌 언니의 자식들은 광복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 대상이 아니다. 특히 이들은 ‘영구귀국’ 대상이 되지 못하는데, 사할린 2세대, 3세대 동포들은 러시아 국적의 외국인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0년 5월 26일 제정되어 2021년 1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약칭 ‘사할린 동포법’) 제2조에서 “사할린 동포란 1945년 8월 15일까지 사할린에서 출생하였거나 사할린으로 이주한 한인(韓人)을 말한다.”라고 기존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동반가족이란 사할린 동포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 1명과 그 배우자를 말한다.”라고 하여 직계비속 1명과 그 배우자까지 지원 대상이 넓혀졌다. 이로써 할머니에게 용돈 15만 원을 받은 장손 조카는 영구귀국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사할린 동포에게 여러 명의 자식이 있다면 이중 누가 과연 사할린 동포법상 그 ‘직계비속 1명’이 될 것인가. 할머니가 15만 원의 용돈을 단 한 명에게만 준 것이 ‘사할린 동포법’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물론 ‘사할린 동포법’이야 국가의 지원범위를 넓히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영역이므로 할머니의 장손 사랑과 비교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다만 화태 시절 끌려간 분들이나 그분들의 자녀는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고생하다 결국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는 점에서 다 같은 역사의 피해자이다. 

  할머니는 이어서 친정아버지의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친정아버지가 화태에 끌려가지 않은 것은 삼 형제 중 막내로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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