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진 Oct 30. 2022

② 오사카(大阪)이카이노(猪飼野)자이니치(在日)와 딸

  

  영정 속 남성은 할머니의 작은 시아버지와 작은 시어머니, 즉 남편의 아버지의 남동생과 그 부인이었다. 그 두 분 모두 제주도 사람이라고 했다. 남편이 기억도 못 하는 아주 어렸던 일제 강점기에 이미 작은 시아버지가 일본 오사카에 건너갔기 때문에 남편도 작은 시아버지가 오사카로 건너간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작은 시부모님들은 해방되고 제주에 돌아왔지만 불안했던 제주 4·3 즈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고만 알고 있다. 작은 시아버지와 작은 시어머니 사이에는 오사카에서 낳은 딸만 하나 있었는데, 두 분이 돌아가시자 그때서야 오사카 딸이 그 두 분의 영정을 제주도에 가지고 왔다. 영정만은 당신들 고향에 모시고 싶다고 했단다. 한국말이 서툰 그 오사카 딸이 자신의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제주에 왔다는 것이 나로서는 참 기특하게 여겨졌다. 그렇게 남편의 4촌인 오사카 딸이 제주도에 잠시 머물면서, 할머니의 딸과 오사카 딸은 조카와 5촌 고모로서 친해졌다.     


 “내 딸이 20살 넘어서 오사카에 넘어가 그 5촌 고모와 잠시 함께 살았었지요. 그러다가 어쨌는지 서로 마음이 안 맞아 안 좋게 헤어졌어. 지금은 그 5촌 고모가 어디 사는지도 몰라요. 그 고모는 마지막에 연락했을 때까지도 결혼을 안 했지. 우리 딸은 일본 남자랑 결혼해서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거기서 살고 있어요. 우리 딸이 일본에서도 나한테 매일 전화해. 내 아들 셋은 다 제주도에 사는데 하나 있는 딸이 나한테 제일 잘해요. 그 사진이 그런 사진이에요.”     


  일본 오사카에는 ‘이카이노(猪飼野),’라는 곳이 있다. 아니 있었다. 1920년대부터 일제 강점기의 제주도에서는 더 이상 살기 힘들어진 제주도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다른 곳이 아닌 오사카에 제주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이유는 이곳이 군수공장 밀집 지역이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의 값싼 인건비로 군수공장에서 무기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해방 직후 자신들의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 시기를 전후해서 1만 명 이상의 제주 사람들이 다시 이카이노로 돌아갔고, 이후 이념 갈등과 국토분단으로 인해 다시 제주도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은 조선인도 한국인도 그리고 일본인도 아닌 ‘자이니치(在日)’가 되어버렸다.


<제2기미가요마루>1886년 러시아 군함으로 건조. 일본이 개조해 1925년 부터 제주-오사카 왕복선으로 사용. 1945년 4월 미공군 폭격으로 격침. [제일제주인센터 전시 촬영]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까지 일본에 있던 조선인을 보통 자이니치라 하고 그 수는 대략 50만 명으로 보고 있다. 일본 법무성 자료에 의하면 일본은 북한과 수교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인 중 일본에 귀화하여 일본 국적을 득한 인원을 제외하고 대한민국 국적 46만 명, 조선인으로 남아 있는 4만 명을 합쳐 대략 50만 명으로 파악한다. 그 가운데 5만여 명 이상이 제주도 사람이다. 그래서 이곳을 ‘일본 속 작은 제주’라고 부른다. 실제로도 제주도의 고유한 사투리가 사라져 가는 21세기에 많은 언어학자들은 제주도 말을 배우기 위해선 제주도가 아닌 이카이노에 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지난 2010년 12월, 제주도 말은 유네스코 지정 ‘소멸 위기 언어’로 정식 등재되었다. ‘소멸 위기 언어’ 다음 단계는‘소멸’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지도에서 찾아봐도 이카이노라는 지역이 없다. 인근 일본 주민들은 제주도 이방인들로 인해 지역의 집값이 떨어진다는 민원을 지방정부에 제기하기 시작했고, 결국 1973년에 이카이노는 ‘나카가와(中川), 모모 다니(桃谷)’로 행정구역이 통합되면서 그 이름조차 사라져 버렸다.


  4·3 사건이 없었다면 이들 가족의 상황은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영정 속 두 분은 해방 후 다시 오사카로 돌아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죽고 나서야 고향에 돌아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제주도 토박이들이 말하는 오사카는 일제 강점기와 제주 4·3의 아픔을 모두 담아내는 지명(地名)인 것이다. 그렇게 사진 두 장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갑작스레 할머니 가족의 4대에 걸친 이야기로 급물살을 탔다.   

   

  “저는 두 분이 일본 옷을 입고 있어서 일본 분들인 줄 알았어요.”


  “아니야, 두 분 다 법환리 분들이지요. 용케 그 사진을 보셨네. ”     


 이미 1965년에 이카이노에 있던 제주 사람이 5만을 넘었다면 이것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1945년 해방된 이후 일본에서 제주로 돌아온 제주 사람의 수가 6만이었고 당시 제주도 인구가 이들을 합쳐 30만이었다고 하니, 제주 사람으로서 가족 중 일부가 일본에 있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평범함이 바로 제주도에서의 제주 4·3 사건이다.     






이전 02화 ① 자왈, 궤 그리고 할망 [숲, 동굴 그리고 할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