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진 Oct 30. 2022

① 자왈, 궤 그리고 할망 [숲, 동굴 그리고 할머니


 제주 자왈(숲)엔 역사가 있다. 13~14세기 고려 시대, 몽골의 마방목지(馬放牧地)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잣성’(고구마 정도 크기의 자잘한 돌로 쌓은 담, 잔돌로 쌓아 잣성 또는 자슨성이라 함)이 여전히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가깝게는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오키나와가 미군에 함락당하자 일본은 본토 방어를 위한 최종 방어선으로 제주도에서 옥쇄를 준비했던 시절이 있다(결 7호 작전). 대본영은 일본 본토와 조선 반도에 있던 일본군은 물론, 만주의 관동군까지 끌어모아 총 7만여 명의 병력을 제주도에 주둔시켰다. 이들이 제주도민들을 핍박해 만들어 놓은 ‘방공호’나 ‘대공포 진지’, ‘공군 활주로’들도 여전히 숲 속에 있다. 

1948년에 지어진 일제진지동굴 [2020년 10월 3일/ 함덕 서우봉 북쪽측면/ 촬영: 세진]


 그리고 4·3 사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약 7년 7개월의 기간 동안 이어졌던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역사가 있다. ‘트’(인민유격대가 은신했던 아지트를 일컫는 은어, 현무암을 거칠게 쌓아 만들었음)와 ‘주둔소’(인민유격대를 소탕하기 위해 군과 경찰이 현무암을 쌓아 만든 전초기지)도 여전히 제주 숲 곳곳에 남아있다.      



  2020년 11월 말 그분을 처음 만났다. 그날 한라산에는 눈이 쌓이도록 내렸다. 토박이들도 놀랄 정도로 그해 겨울엔 눈이 많이 왔다. 사실 제주 숲의 역사를 만나기엔 겨울이 가장 좋다. 무성했던 초록의 풀과 나무는 사그라들고, 뼛가루 같은 흰 눈 덕분에 현무암으로 쌓은 제주의 역사가 시꺼멓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날도 나는 현무암 무더기를 찾을 생각이었지 눈 쌓인 숲에서 사람을 만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효돈천 상류 조릿대 숲 속,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산을 오르니 궤(굴)가 나타났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사람 손을 탄 흔적이 보였다. 나는 혹 역사를 만나려나 싶은 기대감에 굳이 굴 안으로 들어갔다. 한라산 겨울 추위에 차가워진 내 피부에 왈칵 더운 공기가 쏟아지듯 느껴졌다. 흰 눈에 반사된 햇빛에 내내 노출되었던 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동굴 속에 서 있던 난, 말 그대로 쭈뼛 얼어붙었다. 굴속에서 한 할망(할머니)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절 호쏠 올려도 되마씸?”  

   [절 좀 올려도 될까요?]


  “경 헙써.”

   [그렇게 하세요.]     


  컴컴한 동굴 속에서 그나마 간신히 사람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한 자루 촛불 덕택이었다. 희미한 빛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아담한 불상을 향해 나는 세 번 반 절을 올렸다. 

    

  “절 하영 헤본거 닮아마씨. 경허고 무사 이듸 왓수꽈?” 

   [절 많이 해 본 것 같네요.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나요?]


  “나영 제주 4·3 공부호는 사름인디 이듸 뭐영 이시카부덴 와놧십쥬.”

   [저는 제주 4·3 공부하는 사람인데 여기 뭔가 있는 것 같아 와 봤지요.]


  “제주도?”

   [제주도 사람이세요?]


  “아니우다. 육지것마씸.”

   [아니요. 육지사람이에요.]


  “기우꽈? 경헌디 어떵 경 제주말 고람수꽈? 잘도 고람쪄.”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제주말을 하세요? 제주말 잘하네.]     


  나도 나지만 할머니도 나처럼 놀랐다. 놀란 가운데서도 별것 아닌 것에 계속 칭찬해 주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할머니가 그 굴속에서 살기 시작한 건 1980년부터라고 했다. 수도도 전기도 없이 꼬박 40년을 살아왔어도 그렇게 불쑥 굴속으로 들어온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우리 두 사람은 놀라움을 넘는 호기심으로 시치미를 떼며 두려움이 없는 척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적어도 나는 그러했다. 

  불교 신자도 아닌 내가 용케 부처님께 절하는 법은 알고 있어 다행이지 아니면 뒤에 들은 그 귀중한 이야기도 못 듣고 그냥 돌아설 뻔했다. 서너 평 남짓한 동굴 속에 작은 불당을 차려놓고 부처님을 모시고 계신 터라 자연스레 이야기는 그쪽으로 흘렀다.      


  “방금 이 아래 절, 대웅전에서도 절 올리고 왔어요.”


  “아이고, 잘했어요.”


  “그런데 대웅전에 모셔 놓은 영정(影幀) 중에 기모노를 입고 있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혹시 누군지 아세요?”


  “그게 어떻게 눈에 들어왔나 보네요?”     


  숲 깊숙이 들어서기 전, 길 끝에 절이 하나 있었다. 호기심에 들어가 본 대웅전 안엔 돌아가신 영가들의 영정을 모셔 놓은 곳이 있었는데 내 눈을 끄는 사진 두 개가 있었다.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액자 중 한쪽엔 기모노를 입은 젊은 여자를 찍은 사진이, 그리고 그 옆엔 역시 일본 옷을 입은 나이 든 남자를 담은 사진이 들어있었다. 영정이 30~40개 있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몹시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렇게 할머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전 01화 대규모 희생은 왜 발생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