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제주 4·3 공부한다고 했죠?”
“네.”
“우리 친정아버지가 절 신도 회장이셨어요. 그 절에 충청도 스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날 더러 그 절에 와서, 밤에 와서… 야학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6살 때부터 3년을 배웠는데 그때 4·3이 터져버렸어. 9살이면 벌써 알건 다 알아요.”
아버지를 굳이 친정아버지라고 매번 말하면서 할머니는 본인이 겪은, 두서없는 제주 4·3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항상 들고 다니는 메모장과 펜을 꺼내 적기 시작했다. 제주도 말은 외국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어휘나 조사 면에서 표준어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할머니 말씀이 빨라지거나 감정이 격해져 내가 못 알아들으면 일일이 다시 확인해야 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총 7년 7개월에 걸쳐 일어난 일이지만, 특히 1948년 10월부터 1949년 6월 사이인 소위 ‘초토화 시기’에 집중적으로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1948년 10월 17일은 송요찬 9 연대장이 포고령을 발표한 날로, 포고령은 10월 20일 이후로는 제주 전도의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역에 있는 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49년 6월 30일은 한반도에서 미군이 완전히 철수한 날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이 철수하기 전까지 제주도의 소요사태(이승만 관점에서)를 종식시키려 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 특히 과격한 탄압이 벌어진 것이다.
2021년을 기준으로 볼 때 이 초토화 시기를 경험했음은 물론 나아가 그 시기를 기억하기까지 할 수 있는 증언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이미 73년의 세월이 지났기 때문이다. 1949년에 태어난 분들은 초토화 시기를 경험했다고 볼 순 있지만 태어난 해에 있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런 분들조차도 이미 73세의 비교적 고령에 속하기 때문에 초토화 시기를 기억하는 분을 만나 직접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전에도 증언자의 증언을 듣고 궁금한 것이 생겨 다시 연락해 보면 이미 그 증언자가 노환으로 돌아가신 경우를 경험한 바 있다. 증언자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특히 이날 나와 할머니와의 만남은 미리 약속된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할머니가 나를 위해 4·3 증언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할머니의 말에 간섭을 최소화하고 듣는 것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