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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선 Sep 13. 2019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글쓰기

나의 독자는 누구인가



디자이너에게는 당연하지만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은 쉽게 놓치는 것


얼마 전에 아는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랜 기간 해오던 석박사 공부를 마치고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였다. 인터뷰 날짜가 잡혀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자료 준비를 해야 하니 도와달라고 말했다. 꼬꼬마 시절부터 머리 좋은 걸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던 그 친구는 특별한 과외 한번 받지 않고도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전교 1등을 했었다. 대학과 대학원까지 최고 명문대를 나온 사람을 내가 감히 도와준다니 새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디자이너인 나에게 친구가 요청한 것은 예쁜 장표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10년 넘게 해온 연구 결과들과 커리어를 정해진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어떻게든 뭐라도 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뭐라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친구는 중요한 인터뷰를 앞둔 상황에서 상당히 불안한 상태였다. 일주일 후에 발표자료를 보내야 하는데 말 그대로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한 것도 많고 말하고 싶은 것도 많고 자랑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발표 시간은 고작 20분.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서 절박함이 느껴져 만사 제쳐두고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 진정해. 우리에겐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있어. 정해진 시간 안에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가장 먼저 할 일은 재료를 준비하는 거니까 일단은 네가 지금까지 연구한 연구 주제들, 등재된 논문, 수상 이력을 리스트업해 와. 그리고 발표 자료를 어떻게 구성할 건지 대충이라도 목차를 잡아오고. 아, 맞다. 이미지로 활용할 만한 것들이 있으면 그것도 챙겨 와야 해!"


다음날 친구가 시간순으로 항목들을 나열해 요점 없고 지루한 리스트를 보내왔다.


"10년 동안 연구를 했는데 이것들을 하나로 묶는 테마가 없단 말이야? 이런 자잘한 연구는 이쪽에 포함시켜. 연구 성과를 보여준다고 해서 시간순으로 전부 보여줄 필요는 없잖아. 네가 가장 내세우고 싶은 연구가 뭐야? 제일 인지도 있는 학회에 등재된 논문은 뭐고? 정해진 시간 안에 너를 어필하려면 우선순위를 정해야지.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꼭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 3가지로 압축해 와. PPT 장별로 내용 넣어서 가져오고. 모양 꾸밀 생각은 하지 말고."


이후 일주일 동안 내가 한 일은 친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콘텐츠를 정리하고, 압축하고, 키워드를 도출하는 것이었다. 연구 전체를 묶는 하나의 테마를 설정하기 위해. 정작 예쁜 문서 만들기는 마지막 2~3일 동안 이루어졌다.


일주일간 친구를 도우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디자이너에게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은 쉽게 놓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무언가를 만들 때는 그것을 보는 사람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보는 사람과 소통하기


친구는 가진 게 정말 많았지만 자신의 캐릭터는 없었다. 그쪽 바닥에서는 친구만큼 머리 좋고, 스펙 좋은 사람들이 넘쳐났으니 연구 실적이 많다는 것은 그다지 큰 차별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만큼 했어요. 저 대단하죠!"라고 아무리 크게 말해도 전혀 상대방에게 먹히지가 않을 상황이었다.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콘텐츠는 그냥 나 혼자 외치는 소음일 뿐이다.


친구는 발표 준비를 시작하는 시점에 '면접관이 후보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와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 두 가지 질문을 모두 충족하는 답이 곧 발표 문서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니까.


"너는 면접관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그리고 면접관들은 어떤 사람을 뽑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우리가 합의한 것은 '겸손하지만 자신의 연구 분야에 자부심이 있는 세련된 신진 연구자의 이미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방향성에 따라 콘텐츠를 다듬고 문서의 비주얼을 연출했다.


디자이너는 늘상 하는 일이 내가 만드는 산출물이 사용자, 소비자, 독자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아는 것이 많지만 정작 자신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는 명문대 출신 박사님을 도와 회사에 합격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만들 때는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겠다는 목적을 전제하기 마련이다. 소통이란 상대방도 알고 나도 아는 것(보편적인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을 전달하는 일이다.




제 글이 대중성이 없다고요?


디자이너란 구체적인 대상을 설정해 그에 맞춤한 무언가를 만드는 훈련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무질서한 재료들을 하나로 압축하는 일은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이다.


처음 <사수 없는 디자이너가 성장하는 법>이라는 테마를 정했을 때는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는 것처럼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할 것인지 명확히 설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글쓰기를 시작하려고 보니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지나치게 좁은 범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이었다.


언젠가 지인을 통해 출판사 편집자에게 나의 테마에 대한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방향성과 목차, 미리 써둔 글을 가지고 나름의 계획을 전했었다. 주제도 좋고 목차도 괜찮고 필력도 나쁘지 않지만 책으로 만든다는 것을 고려할 때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일단, 출판시장에서 디자인 카테고리가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디자인 이야기도 아니고 디자이너라는 특정 대상을 위한 이야기였으니 잘 써도 많이 팔기가 어렵다고 했다.


'유명한 스타 디자이너가 아니고서는 좀...'


이런 형태의 대중성이 없다는 반응은 하나의 출판사가 아니라 서너 군데의 출판사에서 공통적으로 보여 준 반응이었다.


내 브런치에 있는 초반 4개의 글은 독서법에 관한 글이다. 대중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국 테마를 바꿔 쓴 것이다. 혹시라도 디자이너라는 특정 대상만을 위한 글처럼 보일까 봐 매거진명을 <전문가의 독서법>이라고 지었다. 독서법은 유행을 타지 않는 테마니까 이걸로 시작해보자 싶었던 것이다.


처음에 쓴 <3색 볼펜으로 거침없이 더럽혀라>가 카카오 채널에 올라가면서 14만 뷰를 기록했다. 다른 3개의 글도 다음 메인이나 브런치 메인에 올라가면서 나쁘지 않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외면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글을 못쓰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독서법은 언젠가 꼭 쓰고 싶은 주제이긴 하지만 오직 이진선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글은 아니었다. 글을 처음 쓰는 거라 힘들기도 했고 마음에 동력도 사라져 이후로 2년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내 글을 읽어 줄 더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다시 글을 쓰게 된 것은 디자이너에게'만'을 디자이너에게'도'로 바꿔보자고 생각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가 읽으면 가장 좋지만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도 읽었을 때 충분히 도움이 되는 글을 써보면 어떨까 생각한 것이다. 나는 디자이너이지만 동시에 일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사회초년생 시절 고민하고 방황하며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이기도 하다. 한 사람 안에는 다면적인 모습이 있기 때문에 이를 잘 조합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 글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게 만든다면 그만큼 더 많은 디자이너가 내 글을 읽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며 새롭게 정의한 <사수 없이 일하며 성장하는 법>이라는 매거진의 독자는 다음과 같다.


1. 사수 없이 혼자 일하는 직장인

2. 지금 하는 일에 확신이 없는 사회 초년생

3. 연차는 쌓여가는데 실력에 자신이 없는 직장인

4.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막연한 불안을 느끼는 직장인

5. 디자이너 또는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


최초에 정의한 1번 독자에서 2, 3, 4, 5번으로 범위를 확장했다. 이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글이라면 대중성이 없다는 얘기는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어서 '공감'이란 키워드로 관심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나의 독자가 공감하는 글쓰기


사람들은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것에 매력을 느낀다생전 처음 보는 완전히 새로운 것에는 흠칫 뒤로 물러서기 마련이다. <3색 볼펜으로 거침없이 더럽혀라>가 좋은 반응을 얻었던 이유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메모하는 독서법에 디자이너의 신선한 관점을 녹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 독자들이 '엇! 저거 내 얘긴데!'라고 말할만한 경험이나 생각을 바탕으로 글을 써 보자고 결심했다. 누구나 한 번은 해봤을 보편적인 질문으로 시작해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풀어낼 수 있다면 익숙하지만 새로운 글이 되지 않을까?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살아도 되는 걸까'

'내향적인 사람은 인정받을 수 없는 걸까'

'멘토는 어디에 있는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해 공부하고 사유하고 경험을 더해 글을 쓴다. 그런 이유로 내 글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것이라 믿는다. 꽤 긴 시간 머릿속에만 자리하고 있던 가설들이 확신이 되는 행복한 경험이다. 나의 독자를 고려한 글쓰기는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포함해 앞으로 써나갈 모든 글에 적용할 것이다.


앞에서 나는 소통이란 상대방도 알고 나도 아는 것(보편적인 경험, 지식)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을 전달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공감하는 글쓰기란 곧 소통하는 글쓰기다. 소통은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더하는 것이다.


키보드를 두들기다 보면 당장 눈 앞에 모니터 밖에 없으니 내 글을 읽을 사람을 잊어버리게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공감해주기를 원한다면 질문을 던져보자.


'나의 독자는 누구인가?'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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