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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선 Sep 22. 2019

테마를 구체화하는 목차 만들기

보이지 않는 생각을 시각화하는 목차형 리스트



STEP 1.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를
불안해하지 않기


나는 프로젝트 단위로 계약하고 일하는 프리랜서다. 프로젝트란 언제나 모호함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매번 불확실함의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기분이 든다. 주니어 시절에는 이런 모호함이 그저 두렵기만 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바닥이 드러나면 어쩌지? 부족한 실력이 탄로 날지도 몰라.'


뭔가 시작하다는 말을 들으면 자동으로 걱정부터 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 프로젝트 경험이 쌓이면서 모호함은 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디자인을 의뢰하는 고객조차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까.


사람들이 일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 의해 디자인된 것이다. 우리는 늘 완성된 결과만을 보기 때문에 그 과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처음부터 명확하게 목표가 설정되어 있고, 그에 맞춰 착착 진행해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처음부터 결과를 정해놓고 진행하지 않는다. 더 나은 결과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고 모호함에서 시작해 서서히 구체화시킨다.


디자인을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주어진 조건과 재료를 파악하는 것'이다. 주어진 조건이란 바꿀 수 없는 환경적인 요소들, 즉 통제 범위 바깥에 있는 제약 사항이다. 가장 기본적인 사항으로는 일정, 인력 구성, 산출물의 분량, 고객사 담당자의 성향 같은 것들이 있다. (다른 것도 많지만)


무언가를 시작할 때는 내가 처한 상황(맥락)을 알아야 의지대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 이것, 이것, 이것만 지켜주면 이 부분에서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해 볼 수 있겠는데?'라는 판단이 설 때까지 정보를 수집하고 살펴본다. 제한된 상황 안에서 최상의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숙련된 디자이너의 중요한 자질이다.


조건 파악이 다 되었다면 재료를 수집할 차례다. 재료란 디자인을 할 때 실질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정보다. 생각나는 대로 말해보자면 최신 트렌드, 고객사 현황, 경쟁사 현황, 기능 구현 범위, 수급된 콘텐츠 같은 것들이 있다.


처음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는 말과 글로 디자인을 한다. 그런데 최종 산출물은 눈에 보이고 또한 실제로 사용하는 제품이기 때문에 아무리 말이나 글로 정교하게 묘사한다고 해도 모호함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프로젝트는 상당 기간 진행될 때까지도 그런 상태가 지속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를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STEP 2. 지금 하는 일이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 이것에 집중하기


하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특정 시점에 생각의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내가 지금 무엇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지 명확히 하는 것을 말한다. 디자이너는 모호하게 정리된 말과 글을 시각적인 형태로 구체화시켜서 방향성을 제시해야 하는 사람이다. 언제까지 모호함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시점에서 임의의 작은 의사결정을 반복하며 생각을 정리한다.


세상에는 선택지가 너무 많고, 어딘가 내가 모르는 가능성이 숨어 있어서 더 알아보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 것 같은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니 이 부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 이것에 집중하자!'라고 정하는 것이다. 일정한 범위를 설정하고 경계선 밖에 다른 것이 있다는 사실까지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계선을 긋기 전까지는 최대한 아이디어를 확장한다. 1차로 대략의 틀(방향성)을 잡아 고객과 공유하고 의견을 받아 다음 버전으로 발전시킨다. 이런 과정을 디자인에서는 '발산과 수렴을 반복한다'라고 말한다. 아이디어를 확장(발산)하고 그중에 중요한 것을 선별(수렴)해 다시 그 안에서 세부 아이디어를 확장한다. 생각을 정교화시키는 기본적인 프로세스다.


구구절절 디자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러한 디자인 프로세스를 글을 쓸 때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글을 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진짜 목표는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나만의 채널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글 하나를 쓰더라도 여러 가지 조건과 재료를 고려한 전략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STEP 3. 채널을 의지대로
디자인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기


디자이너의 글쓰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차별점은 '하나하나의 글 단위가 아니라 채널 단위로 접근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채널을 의지대로 디자인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채널을 만들자마자 바로 '뭐부터 쓰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채널의 방향성을 먼저 고민하고 나서 거기에 맞는 글쓰기를 시작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할 때는 최종 결과물을 확정하고 시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막무가내로 시작하는 것도 아니다. 비록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어도 나름의 큰 '방향성(테마)'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아이디어의 발산과 수렴을 반복하고, 중간중간 생각의 경계선을 긋고, 하나씩 작은 의사결정을 하면서 구체화시켜 결국 눈에 보이도록 실체화하는 것이다.


이진선이라는 사례를 들어 얘기해 보자. 채널 만들기는 자연인 이진선이 디자이너 이진선에게 의뢰 한 최초의 사이드 프로젝트니까.


다음은 자연인 이진선의 의뢰 내용이다.


"저는 내향적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싶어요. 내가 아는 것, 내가 경험한 것, 내가 성장하는 과정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거든요.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뭐라도 어떻게 좀 해주세요. 디자이너 님."


의뢰를 받은 디자이너 이진선은 방향성을 정하기 위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질문 1.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요?

( = 내가 줄 수 있는 것 )


질문 2.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가요?

( = 내가 얻고 싶은 것 )


이는 주어진 조건과 재료를 파악하도록 도와주는 기본적인 질문이다.




답변 1.
자기 일을 잘하고 싶지만 확신이 없는 평범한 99%의 디자이너와 직장인들을 위해 제가 아는 것을 나눠 주고 싶어요. 저는 비록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제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요, 나름의 자부심도 있어요. 책 읽는 걸 좋아하고, 일을 잘하고 싶어서 여러 가지 배운 것들도 있거든요. 먼 나라 얘기 말고 실질적이면서 가깝게 느껴지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누군가를 가르친다기보단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생각의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답변 2.
저는 내향적인 사람이라 누구 앞에 나서거나 저 자신을 포장하는 걸 못해요.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요. 내 자리에서 내 일만 잘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진정한 전문가는 혼자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하는 사람이라는 내용을 여러 책에서 반복해서 보게 되었어요. 진짜 전문가는 영향력을 갖고 있고, 후배들을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의무이자 소명으로 생각한다고요. 저는 진짜 전문가가 되고 싶어요.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답을 하다 보니 채널이 나아가야 할 대강의 방향성이 보였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명을 '내향적인 디자이너 이진선의 대외적인 소통 창구 만들기'로 정하게 됐다. 더불어 어떤 내용을 어떤 분위기와 어떤 문투로 쓸 것인지 어렴풋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STEP 4.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다음으로 이어서 한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파악해 본 것이다. 바로 리스트를 만든 것인데, 이는 곧 내 안에 어떤 재료들이 들어 있는지 눈에 보이도록 밖으로 꺼내는 작업을 말한다. 자연인 이진선이 말한 '답변 1'에 대해 더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리스트 항목들은 문장일 수도 있고 단어 일수도 있다. 뭐든 상관없다. 일단 한계가 올 때까지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다 끄집어낸다. 그렇다면 몇 개까지 리스트를 만들어야 할까? 50개? 100개? 300개? 수를 센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리스트를 만드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리스트가 어느 정도 모이면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아마 항목들이 중복되는 것도 있고, 비슷한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내가 생각하고 떠올리는 것들이 몇 개의 큰 덩어리를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덩어리 하나하나가 나의 테마가 된다.


[왼쪽] 첫 번째 리스트 - 글을 쓰기 전에 생각나는 대로 아이디어 발산   [오른쪽] 두 번째 리스트 - 글을 쓰기 시작한 후 책의 목차처럼 그루핑하고 세부 항목 보완


큰 덩어리 안에서 다시 그루핑을 한다. 나는 일종의 책을 위한 목차를 만든다고 생각하면서 정리했다. 낱개의 항목들을 묶는 소제목을 짓기도 하고, 작은 그룹들의 순서를 바꾸면서 전체 흐름을 구성해 보기도 했다. 목차형 리스트는 테마를 풀어가는 지도 역할을 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잘 만든 목차가 책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것이다.


리스트는 유동적이다. 언제든지 새로운 생각이 추가될 수 있고, 소제목이 바뀔 수도 있고, 새로운 섹션이 추가될 수도 있다. 내가 성장하면 그만큼 목차도 정교해진다. 한 번에 잘 다듬어진 완벽한 테마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유를 가지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리스트에 항목을 추가한다. 현재 내가 쓰고 있는 글 하나하나는 그렇게 모아놓은 리스트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글쓰기가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을 때 (바로 지금!) 나를 키보드 앞에 끌고 와 앉혀 주는 것이 바로 이 리스트다.


세 번째 리스트 - 항목, 소제목, 순서를 계속 다듬으며 한층 정교화시킴





보이지 않는 생각을 눈에 보이게
리스트로 만들어 보자


누군가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말할 때면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눈에 보이게 리스트를 만들어 봐!"


그럴 때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너무 뻔한 얘기 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알았다고 말하고선 안 하거나, 해봤다고 하지만 너무 빈약한 리스트만 만들고 잊어버린다. 아마도 생각을 시작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내가 나에게 던진 두 가지 질문을 활용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요?"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가요?"


막연하고 모호해도 불안해하지 않기를. 나도, 저 사람도 그리고 저기 있는 사람도 모두 같은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으니까. 그저 매일 조금씩 모호함을 줄여가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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