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스토너>를 읽고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었고, 영미소설이란 장르도 내겐 꽤나 낯설었다. 하지만 평소 즐겨 읽던 일본소설과는 달리 그 나름의 맛이 있었다. 아래의 문장처럼 시적이고 아름다웠던 비유적인 표현들이 바로 그 중 하나다.
그동안 내내 그는 강의와 연구를 계속했지만, 때로는 맹렬한 폭풍 앞에서 등을 구부리는 것이나 질 나쁜 성냥의 흐릿한 불꽃을 양손으로 오목하게 감싸는 것처럼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너를 사기 전까지 우리 집에 소설이 채 1권도 없음을 깨달았다. 내 책장엔 주로 “성장”이라는 구체적 목적을 위한 책들이 주를 이루었다. 소설은 그 시간의 재미를 위해 한번 읽고 다시 도서관에 반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느껴진 장르였다. 하지만 문학 작품이 주는 이 여운과 울림의 크기를 스토너를 통해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2주동안 나는 “윌리엄 스토너”라는 사람의 삶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그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지닌 책들을 읽었을 때보다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실패한 결혼생활을 했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했으며, 원치 않는 강의를 수 년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실패”라고 정의하기에 충분한 일들이 그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삶의 순간순간들에 열정을 다했으며, 하나의 멋진 삶을 살아냈다. 나는 과연 그와 같은 멋진 삶을 살 수있을까? 최근 앱을 만들고 있다. 벌써 4개월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많은 부분 진척이 되었지만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게 될지, 아니면 그저 이 세상의 수많은 앱들처럼 잊혀지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스토너가 자신이 쓴 책에 자신의 조그마한 일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처럼, 나에게도 이 앱이 그런 의미를 가질 수 있진 않을까 생각해본다.
모두의 인생이 그러하듯, “만약에”라는 질문이 때론 인생을 따라다닌다. 스토너의 삶을 바라보면서도 그러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그레이스가 어머니의 개입없이 아버지와의 시간을 조금 더 보낼 수 있었다면”, “만약에 스토너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캐서린과 떠났더라면”. 하지만 만약이라는 질문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인생은 속절없이 앞으로만 흘러간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때론 완벽하지 않은, 심지어 어리석게 보이는 선택들도 채워진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들과 시간들이 모여 완전한 하나의 삶을 이룬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들을 할 것인가. 삶의 마지막 순간 나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 나의 삶을 바라볼 것인가. 아직은 답을 찾아나가는 중이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나를 던져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스토너가 깨달았듯 결국은 우리도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