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바닷가 앞에서 넉을 놓고 있다가 막히니까 일찍 서울로 출발하자고 해놓고는 자꾸 5분만 더, 10분만 더를 외치다가 결국 아쉬운 마음을 안고 출발했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지 요사이 흘러가는 시간들이 어찌나 빠르던지 피부로 체감이 될 정도이다. 아니면 다친 발목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어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자꾸만 주변에서 너 늙어서 회복도 더딘 거라며 하도 타박을 하니. 그런 사람들하고는 연을 끊어야 하나. 흠흠. 여하튼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은 나이에 비례한다고 했던가. 언니들도 마찬가지인지 만날 때마다 은퇴이야기가 빠지질 않는다. 아직은 한참이나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게 모르게 그때를 조금씩 생각하게되나 보다.
서울로 출발하는 차 안에서 연말 한라산 설산 등반만큼이나 중대한 계획에 대해 얘기해줬다. 보다 더 인생을 재미있게 살 계획들 말이다.
예전에도 가끔 우스갯소리로 서울 근교에 우리들만의 오피스텔이라도 하나 장만하자고 했었다. 남편이나 자식들 뒤치다꺼리에 짜증이 나서 혹시라도 돌연 집을 나오고 싶거든 잠시 하루 묵어가는 우리만의 아지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었다. 다 같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마련해보자고. 왕언니가 '야, 그러다가 한날 다모이면 어쩌냐?' 하니 둘째 언니가 '그럼 그날은 다 같이 밤새 술 먹는 거지 모~ '하고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아찔했던 수다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스케일이 더 커졌다. 왕언니는 은퇴가 10년 정도 남았고 이중에 막내인 나는 17년 정도가 남았다. 은퇴 전에 왕언니가 제일 먼저 속초에 가서 자리를 잡겠단다. 왕언니가 먼저 속초에 있는 사업소로 가서 기반을 잡고 있을 테니 다들 뒤이어 속초로 이동을 해오라는 거다. 그때쯤이면 자녀들이 다 대학 갈 거고 시골에서 잠시 여유롭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면서.
다 같이 휴일에는 골프도 치고 계절별로 맛집도 찾아다니면서 사는 건 어떠냐고 말이다. 금방이라도 그렇게 인생의 계획이 확확 수정될 것처럼 우리들은 신나서 각자의 버킷 리스트를 쏟아냈다. 최대한 황당하고 어이없는 계획들을 쏟아냈다.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어떤가. 현재 시점에서는 황당할지 몰라도 10년 이후엔 더 이상 황당하거나 비현실적인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것도 없지 않겠다. 꼭 그와 같지 않더라도 최대한 비슷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마음먹는 데에만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만 않으면 된다.
계획이라 말하기엔 아직 허무맹랑한 얘기이고, 꿈인지 희망사항인지 아니면 그 중간인지 모를 미래의 일들이
어쩌면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설사 당장 실현되기 어려울 지라도, 막상 헤어지고 본업에 뛰어들면 사느라고 이런 얘기들은 금세 다 잊을지라도 이런 얘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우리 셋다 막연한 기대감과 이유모를 설렘으로 속초를 떠나왔다. 이제 다시 본캐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살아갈지 모르겠지만 남은 시간 동안 아니 우리 인생의 어느 한순간만이라도 함께 보내자고 함께 먹고 함께 놀며 함께 웃자고 얘기해 주는 상냥한 마녀들이 있어 든든하다고 서울로 접어든 꽉 막힌 도로에서 생각해본다. 인간에게 행복한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가 진정 사랑하는 사이가 아닐까. 행복의 순간을 기억하는 능력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본캐니까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