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언니가 속초의 한 레지던스 호텔의 숙박권이 생겼으니 여행을 가자고 해서 일사천리로 여행 날짜가 잡혔다. 여행의 기쁨은 출발하기 전의 설렘이 절반이다. 그러나 그러한 설렘을 반감하는 일이 있었으니. 한 달 전부터 남편들에게 1박 2일 자리(금-토) 여행 계획을 말했지만 역시나 우리 남편들의 골프 라운딩은 끝날 줄을 몰랐다. 날도 풀리고 코로나도 슬슬 풀려가는 분위기라 바쁜 골프일정이 있나 보다.
여의도에서 출발한 언니들이 나와 하남 언니를 잠실에서 픽업하고 속초로 출발하는 차 안에서 우린 남편들의 골프 일정에 대해 불만을 늘어놨다. 그날 하남 언니만 제외하고 모두 남편들이 라운딩을 나갔거나 우리가 돌아오는 토요일에 갈 예정이었다. 고작 하루 반 아내들의 여행인데도 남편들이 자기들만 생각한다는 둥, 아이들은 그럼 누가 챙기냐는 둥, 일정을 미리 얘기해줬으면 골프는 다음으로 미뤄야 하는 거 아니냐는 둥, 하루 반 휴가라도 맘 편히 갈 수가 없다는 둥 우리들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늘 신나는 출발이다.
1박 2일 속초여행코스로 몇 개의 블로를 검색하고 작년에 우리가 들렀던 장소도 빼고 여행코스를 짜 봤다. 언니들이 하나씩 가고 싶은 곳을 얘기하니 코스가 완성된다. 하루반 일정인데도 오밀조밀 촘촘하게 속초 여행 일정을 짜서 언니들에게 보냈다. 너무 빡빡한 거 아니냐, 무리하지 말자, 시간 되는 대로 다니자 등등 언니들은 여유로운 여행이길 바랬지만 내가 시간을 허투루 쓰기 싫다고 핑계를 댔다. 하지만 실은 늘 따라다니기만 하는 막내인 나의 미안함 때문이기도 했고 짧은 여행이지만 언니들과 하고 싶은 게 많았던 건 내 욕심이기도 했다.
금요일 오전 서울을 출발해서 설악산 케이블카를 먼저 타러 갔다. 나는 케이블카가 처음이었는데 언니들은 아주 오래전에 와본 적이 있나 보다. 셋째 언니는 연애할 때 그러니까 20년쯤 전에 지금의 남편분과 왔었는데 옛날 생각이 난다면서 남편분께 메시지를 보냈다. 언니의 남편분이 보낸 답신은 '누구 좋으라고 뛰어내리진 말고.'였다. 정말인지 참신하다고 해야 할지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몰라서 한바탕 다들 웃었다. 별거 아닌 것으로도 여기 이렇게 모이면 즐거운 법인가 보다.
케이블카를 타려고 줄을 서 있자니 세상 참 넓고 가볼 곳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가족들과 다시 와야겠다는 다짐을 했더랬다. 여전히 남편은 골프일정으로 바쁠 것이고 아이의 주말 학원 일정으로 바쁘겠지만 노는 것도 중요하므로!
금요일인데도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많이 기다리지 않고 탑승할 수 있었다. 날씨가 흐려서 봄 기분 마냥 내려고 얇게 입고 온 나는 다소 춥게 느껴진 데다 권금성 정상으로 올라가니 더 춥게 느껴졌다. 이번 여행엔 꼭 셀카봉을 가져가자고 말한 셋째 언니는 역시 셀카봉은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남편 것을 들고 갔는데 한 번도 내 손으로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은 적이 없는 나는 셀카봉의 리모컨과 블루투스 연동이 잘 안 돼서 결국 휴대폰 카메라의 타이머로 사진을 찍었다. 속으로 전날 작동 좀 시켜보고 올 것을 후회를 하면서.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산과 바위와 나무들을 배경으로 한바탕 시끌벅적 사진을 찍고 내려와서는 길쭉이 호떡을 하나씩 사 먹자고 한다. 아침도 다들 부실하게 먹고 움직여서 그런지 곧 점심을 먹으러 갈 텐데도 맛을 봐야겠단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반죽이 쫄깃쫄깃하고 호떡 소가 달달했다. 추운 날씨에 살짝 떨었던 나도 몸이 녹고 속이 든든해졌다.
이번 여행에도 역시 할 일없는 막내라 총무에 정산을 담당했는데 생각 없이 결재를 하고 영수증을 구겨 넣었는데 뭐든 똑 부러지는 셋째 언니가 이 호떡 한 개에 얼마지? 한다. 설악산 국립공원 입장료와 헛갈린 내가 4,500원이라고 했다가 언니들이 발끈했다. 호떡이 한 개에 4,500원이면 너무 비싸다면서 가게 앞 메뉴판에 적힌 금액을 보니 3,000원이라면서 점원이 결재를 잘못했다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결론은 점원은 잘못이 없었고 내가 영수증을 착각한 거였다. 언니들이 이렇게 허술해서 총무 시키겠냐면서 한바탕 웃고 난리가 났다. 별거 아닌 일로도 이렇게 금방 우리는 흥분을 하고 시끄러워지고 화기애애하다. 폭풍 검색을 마친 셋째 언니는 인터넷에서도 길쭉이 호떡이 있다면서 우리끼리 공구하자고 한다. 뭐든 사서 나누는 우리들이다.
점심은 일정의 한 부분으로 생각해둔 식당에서 짬뽕 순두부로 해결하고 숙소로 들어갔다. 에너지가 넘치던 우리들이었는데 막상 체크인을 하고 거실에 앉자 푹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점심 식사가 늦어진 탓에 오후 일정은 속초 아이 대관람차였는데 다음 날 토요일 오전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일정은 바꾸라고 있는 것이니까. 둘러앉아 저녁은 역시 내가 짜 온 일정처럼 속초관광 수산시장으로 가서 구경도 하고 먹을거리를 사 와서 숙소에서 안주삼아 한잔 하자고 결론이 났다.
짐을 풀고 쉬다가 수산시장으로 나가려고 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데 호텔 내에 야외 수영장이 보였다. 이른 봄인데도 사람들이 수영을 하고 있었다. 온천이라고 한다. 왕언니가 수영복을 챙기라고 할까 하다가 말을 안 했다고 한다. 멀리 청초호도 보인다. 순간 여기 서울이 아니라는 진한 설렘이 다시 밀려온다.
시장에 가서 많은 인파들을 헤치고 오징어순대, 감자전을 사고 어쩐지 메뉴가 느끼하다고 해서 분식집에서 떡볶이랑 어묵을 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왕언니의 소주와 캔 번데기 안주를 샀다. 이날은 내 생일이기도 했었는데 왕언니도 생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남 언니와 셋째 언니가 중간에 내려서 굳이 생일 케이크를 사 오셨다. 케이크 위에 올라간 내 나이 숫자를 보고 놀라 기겁을 했더니 언니들이 왜? 네 나이 틀려? 하신다. 아니. 뭘 또 이렇게 대놓고 숫자로 초를 준비하고 그러나.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하긴 하지만 언니들과 노래도 부르고 촛불도 끄고 사진도 남기고 정말 오랫 만에 생일다운 생일을 보냈다. 하반기에 나머지 두 언니의 생일은 또 나와 왕언니가 챙기기로 하면서~
같이 온 사람들도 편하고 안주도 맛있으니 술도 맛있다. 즐겁게 목이 아프도록 떠들어도 12시 정도가 되자 다들 자자고 한다. 아이고 나이는 못 속여.
다음날(토요일) 아침 일찍 전날 시장에서 못 산 술빵을 사러 간다면서 두 언니들(하남 언니, 셋째 언니)이 길을 나섰다. 전날 술빵 파는 집에 사람들 줄이 정말 길었는데 그 긴 줄 만큼이나 어쩐 찌 모락모락 김 올라오는 빵이 맛있어 보였나 보다. 두 분이서 개선장군처럼 양손 가득 빵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선물이라면서 한 봉지씩 안겨준다. 역시 나눠먹는 건 맛있어~! 우리들은 전날 배가 불러 먹지 못한 생일 케이크와 모닝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호텔 체크아웃을 했다.
셋째 언니가 타보고 싶어 한 속초 아이 대관람차를 타러 갔다. 왕언니가 주차를 하는 동안 둘이서 얼른 내려 매표소 줄을 섰다. 관광지답게 기다람의 연속이다. 대관람차는 개장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날씨는 끝내주게 맑고 캡슐같이 생긴 대관람차 안에서 보는 속초 앞바다는 눈이 부시게 푸르렀다. 바다를 배경으로 연신 잘 안 되는 셀카봉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기다리면서 볼 때는 굉장히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막상 올라가 보니 금방 내릴 때가 되었다. 스키장 곤돌라보다 더 빠른 느낌이랄까.
아쉬운 대관람차 탑승 후엔 속초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물회를 먹으러 갔다. 누구나 속초에 온다면 한 번쯤은 가봤을 법한 유명한 물회 집이었는데 물회를 먹고 언니들은 다 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집에서 기다리는 자녀들을 위해 물회를 포장 주문을 했다. 물회를 먹고 나서는 속초에서 유명하다는 닭강정을 사러 갔다. 집에 가져갈 술빵과 물회에 이어 닭강정이라니~ 언니들은 분명 속초를 털러 왔나 보다. 남편에게 닭강정 사가? 하고 문자를 보내니 '당연하지'하고 답장이 초속으로 날아온다. 우리는 닭강정을 사고 서둘러 서울로 출발을 했다. 뒤 좌석에서 물회를 포장한 스티로폼 박스들이 서로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었다. 어쩐지 우리들의 속초여행은 집에 남아있을 가족들을 위한 먹거리의 장보기 같은 느낌이 되었다. 역시 엄마들은 엄마들이다. 혼자만 여행 다녀와서 미안한 마음 담아 식구들에게 맛있게 먹일 참이다. 남편도 골프 라운딩을 다녀오면서 양손 가득 맛난 것을 좀 들고 오면 좋으련만.
회사 사람들과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니 남편이 '당신들이 이상한 사람들이야.' 이런다. 회사 사람들은 업무적으로 만나게 돼서 친해지기가 어렵긴 하다.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도 업무적으로 엮이게 되면 사이가 멀어지는 경우도 많다. 겪어보니 기대와는 다른 사람인 경우도 많으니. 게다가 다 같이 일정을 맞추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어려운 일을 해내니 우린 남편의 말처럼 이상하지만 대단한 사람들이다. 우리들의 만남은 처음엔 마음 맞는 우리들끼리 지사를 하나 차리자는 둥,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상사로 앉히자는 둥, 개념 없는 상사 험담부터 짜증 났던 회사 일들 서러움 푸는 이야기들로 시작했다가 어떻게 하면 잘 놀아볼까 하는 이야기로 끝나는 듯하다.
며칠 전 정말 오랜만에 연락을 준 내 고등학교 동창은 자기 주변에 참 잘 사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자신만 빠듯하게 산다는 느낌이라고 하소연을 했다. 어떤 게 잘 사는 거냐고 물었더니 집 있고, 차 있고, 운동하고, 취미 활동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내세우기 좋은 사람들은 집은 어디에 있느냐, 차는 어떤 차인지 운동은 어떤 종류인지도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이 와중에 남편이 '나는 잘 노는 사람들 보면 부럽더라.'하고 한 말은 내게도 많은 공감이 되었다. 미래의 행복을 저당 잡힌 채 현재를 불행하게 낙담한 채로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 운동이든 취미든 시작하려면 뭐든 돈이 든다고 친구도 말했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먹고살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면 우린 얼마든지 잘 놀 수 있다. 나는 집 없고 차도 변변치 않아도 잘 놀고 싶다. 이왕이면 상냥한 마녀들처럼 마음 맞고 좋은 사람들과 자주 만나서 놀 수 있다면 더 즐거운 인생이 되리라. 셋째 언니가 공동 구매해준 길쭉이 호떡을 오늘은 꼭 회사 냉장고에서 집으로 가져가야겠다. 같이 놀아야 더 재미있다. 어떻게 하면 함께 더 잘 놀면서 살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