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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걸어 나와서

영종도 바다 앞 멍 때리기

by 시코밀

오늘은 11월의 마지막 금요일이면서 전사 휴일이다. 우리들은 이날 하루 교외로 짧은 여행을 가기로 했었다. 평소처럼 카카오 단체 톡방에서 어디가 좋을지 서로 가고 싶은 곳을 얘기하기보단(다들 생각하기가 귀찮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왕언니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여의도역으로 10시까지 모이라고 한다. 대체 어딜 갈 거냐고 서로 궁금해서 한 마디씩 하는데 여의도면 어쩐지 인천 쪽으로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일 캠핑인가?


약속 시간은 10시인데 이날 나는 평소 출근하는 것처럼 출근을 했더랬다. 평상시 같으면 남편에게 언니들하고 나들이를 나간다고 호기롭게 자랑도 했을 텐데 이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코로나가 끝날 듯 끝나지 않은 요즘 우리 회사는 재택은 가능하지만 우리 회사 사람들은 현장근무가 많던 그렇지 않던 아무도 재택은 하지 않는데 남편회사는 다르다. 아직도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재택이 허용된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화상회의에 전화에 바쁘긴 할 테지만. 어찌 되었든 재택이라고 일어나지도 않는 남편을 뒤로하고 학교에 가는 아이방을 몇 번씩 드나들면서 깨우고 아이 아침을 준비하고 나도 씻어야 하는데 갑자기 분노 게이지가 올라간다. 재택이면 좀 일어나서 애 좀 깨워주든가.(사춘기 딸아이는 밤엔 체력이 남아 늦게까지 놀다가 아침엔 일어나지 못하는 여는 중학생과 같다.) 여하튼 자기는 혼자 하숙생이지. 평소 같으면 나도 남편을 깨워서 도와달라고 했겠지만 이날은 말도 하기가 싫었다.


오늘따라 아이는 일어나기가 버거운지 겨우 상체만 일으키고는 오늘 학교 안 가면 안 되냐고 그런다. 엄마 혼자 놀러 가는 것을 아는 건가 하고 속으로 뜨끔 했더랬다. 오늘따라 왜 이리 중3병이 도졌을까 싶다. 미안하긴 한데 넌 일어나기 힘들다고 학교 안 가고 그럼 안되지. 하고 속으로만 말하고 올라오는 화를 참고 '엄마는 네가 학교에 갔으면 하는데.' 했더니 '알겠어.'하고 풀 죽은 답변이 돌아온다. 평상시에도 사춘기 딸 깨우기가 힘들 때마다 아침마다 우리 딸들을 깨우던 아빠의 불호령이 생각나곤 한다. 힘들고 피곤하면 하루 쉬게 하면 좋겠지만 그러기 힘들어서 안타까웠다. 외국은 마음이 힘들다고 하면 이유도 묻지 않고 며칠씩 쉬게 해 준다는데 여긴 한국이니까 억지로 학교에 보낸다. 아이를 겨우 일으켜 학교에 보내고 내가 문밖을 나올 때까지 남편은 침대에서 눈도 뜨지 않았다. 지하철에 타자마자 바쁜 아침에 재택이면 좀 도와주지 하고 서운한 말을 남편이 이해하든지 말든지 카톡에 쏟아냈다. 엄마라는 딱지를 겨우 떼어내고 여의도로 출발한다. 모르겠다. 나는 출발한다.




그렇게 남편 덕에? 약속시간보다 20분 일찍 도착한 나는 단톡방에 '언니들 커피?' 하고 메시지를 남긴다. 언니들을 위해서 김밥을 사는데 하남 언니도 도착을 했다. 같이 카페로 가서 커피도 주문한다. 셋째 언니가 시간에 거의 임박해서 도착해서는 우리더러 왜 이렇게 일찍 오냐고 그런다. '음~ 커피랑 김밥을 사려고?'(웃음)


제법 쌀쌀한 11월 아침 공기를 느끼면서 우리는 왕언니 차에 올랐다. 도착을 하기 전까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가면서 김포공항 이정표가 나오는데 하남 언니가 그런다. 우리 공항으로 가는 거야? 오늘 비행기 타는 건가? 하고 우스개 소리를 한다. 아 진짜 이대로 제주도를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잠깐 딴생각을 한 사이, 왕언니가 비행기를 타려면 선글라스를 써야 한다면서 선글라스 없는 사람은 안된다고 한다. 운전하는 왕언니와 막내인 나만 선글라스를 챙겼으므로 남은 두 사람은 비행기에 못 타겠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농담으로 가는 길이 웃음으로 가득 찬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잠시 김밥과 커피를 마셨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주니 따뜻한 커피가 제 맛이다.


한 시간쯤 더 달려서 도착한 곳은 바닷가 앞에 자리한 예쁜 카페 겸 이벤트 룸이 있는 펜션이다. 전날 축구경기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한차례 와서 밤새 경기도 보고 아침에 다들 물러갔나 보다. 왕언니는 저녁까지 룸을 대여한 모양이다. 4층이라 바다가 내 집 앞 정원처럼 펼쳐져 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펄럭이게 불어와도 햇살이 좋아서 무릎담요를 하니씩 챙겨서 베란다에 줄줄이 앉았다. 썰물 때인지 물이 빠져있어서 갯벌이 보이는데 저 멀리 햇살을 받아 바다가 은색으로 일렁인다. 한 시간 반만 나오면 우리 각자의 삶에서 이렇게 걸어 나와 휴- 하고 한숨을 쉴 수 있는데 참 쉽지 않다. 우리들 일상은 큰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여전히 바쁘고 마음은 싱숭생숭하다. 그래서 가끔은 억지로라도 이런 여유가 꼭 필요하다.


새로운 곳에 좋은 사람들이랑 와서 들뜬 마음으로 점심으로 바비큐를 준비하려고 일어났다. 셋째 J언니는 세척? 담당이라(어쩌다 보니) 상추와 과일, 반찬, 바지락 탕 등을 준비하고 왕언니와 하남 언니는 숯불을 피우겠다고 한바탕 난리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면서 말로는 엄청 엄살을 피우면서 그래도 숯불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이다. 전날 왕언니와 셋째 J언니가 간단하게 장을 봐왔다고 했다. 언제 다 이런 걸 준비한 거야. 쪽갈비는 미리 양념을 해오셨다. 소시지에 목살에 셋째 언니가 준비한 와인까지 고기가 술술 넘어간다. 바지락탕에 살짝 넣은 청양고추가 칼칼한 맛을 더하니 시원하다.(역시 우린 국물이 있어야 해.) 아 명란젓갈 소스. 고기에 처음 싸 먹어보는데 저염 명란을 사다 마늘, 파, 고춧가루, 참기름 등을 넣고 양념을 하셨다는데 역시 우리 왕언니다. '나 정말 이런 거 처음이라고.'를 한 열 번쯤 외치셨던 거 같은데 그러면서도 연기를 마셔가며 고기도 다 구워주시고, 오늘 운전도 하시고 최고다. 다음엔 남편이라도 고기 굽게 데려와야 하는 건가 잠시 생각했더랬다. 막내인 나는 왔다 갔다 하면서 언니들 사이에 걸리적거리기나 하면서 아무것도 못했다. 이런, 설거지는 꼭 해야겠다 다짐을 한다.


테이블에 반찬과 고기와 상추와 바지락 탕이랑 한껏 올려놓고 다 같이 와인잔에 짠하고 나니 딸에게 전화가 온다. 하교를 2시간 남겨놓고 머리가 아파서 조퇴를 하겠단다. 담임에게 확인 문자를 넣어줘야 한다고. 그 두 시간을 못 참고 결국 조퇴를 하나 싶었는데 한편으론 아침부터 힘들다고 했었는데 무시하고 기어이 학교를 보내 미안하기도 했다. 아이는 집으로 가서 쉴 텐데 여행 내내 챙겨주지 못한 엄마의 마음과 마음 놓고 대여섯 시간만이라도 이렇게 바다 보기가 어려운 건가 하는 마음이 한데 뒤섞여 마음이 편치가 않다. 여하튼 나는 지금 여기에(영종도)에 있으므로 딴생각은 접어두자.


셋째 J언니가 가져온 와인은 한잔씩 밖에 안 마셨는데 우린 금방 술이 올라왔다. 낮술은 왜 빨리 취하는 것인가는 항상 내 관심거리이긴 하다. 여하튼 고기에 든든하게 먹고 창가 소파에 과일 디저트를 놓고 둘러 았았다. 한바탕 신나게 수다타임을 갖는다.(뭐 우리에게 수다의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후가 되니 바닷물이 점점 불어 펜션 쪽으로 다가왔다. 밀물 때라 바로 코앞에 바다가 있는 것 같았다. 반짝이는 윤슬이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저 멀리 수평선을 보면서 멍 때리는 것만으로도 잠시 숨을 고르면서 다시 돌아갈 일상을 달래 본다.



벌써 펜션에서 나갈 시간 이어서 어수선하게 각자 정리를 시작한다. 청소를 핑계로 왕언니가 주인집 카페에서 커피를 사 오면서 30분 더 강제로 부여받는다.(주인은 청소를 위해 어서 나가주길 바랬으나 우린 그냥 30분 더 뭉갰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다음엔 꼭 1박을 하자면서 서울로, 일상으로 다시 향했다. 바비큐를 피웠더니 온 몸에서 불냄새가 난다. 도착 후 단톡에서 옷이며 머리에서 냄새가 난다고 한바탕 난리법석이다. 엄마 딱지를 다시 몸에 붙이고 바닷가 바비큐 추억 딱지를 떼려고 세탁기를 돌린다. 셋째 J언니에겐 여전히 고등학생 자녀 학원 픽업이, 내겐 아이 저녁상이, 각자의 삶이 예정된 일처럼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삶 속으로 출발이다.


우리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마 절반은 자기 얘기 또 절반은 남의 얘기였을 것이다. 우리는 쓸데없는 얘기들을 하려고 만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누구와 쓸데없는 얘기들을 나누는가. 사람들은 아무 하고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쓸데없는 얘기들을 할 수 있어 감사하고 들어줄 서로가 있어 감사하다. 그 이야기들은 결국 우리들의 속내이고 그 속내들이 모여 삶이 된다. 아까운 시간들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시간이 더 이상 유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늘 끝이 있기에 아쉽고 더 소중한 법이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더 빨리 가는 이유는 그저 바쁘기만 하고 의미 있는 일들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 중에 그리고 우리 인생 중에, 아까운 시간 소중한 사람에게 더 쓰면서, 좋은 생각만 하면서 살기로 합시다. 우리. 그래야 시간이 느리게 갈 거예요. 찬성하는 사람 손?




"기록되지 않은 일은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다."

- '알고 싶니 심리툰', 팔호광장, 2020, 큐리어스



Pictures by J언니, 시코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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