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슈를 건넬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이토록 놀라운 내담자 경험_ 긴 글 주의
환자 보호자를 위한 무료상담
나보다 앞서 상담사의 길로 들어선 사촌언니는 23년도 겨울을 맞이한 내게 '환자 보호자를 위한 무료상담'을 소개해 주었다. 총 5회기까지 신청할 수 있었고 대면 상담으로 3회기를 신청하였다. 상담사들은 실력 있는 전문 상담사들로 지역과 시간대를 고려하여 무작위로 매칭되는 것 같았다. 상담대학원 1학차를 끝내면서 이상심리 교수님께서는 내담자 경험도 중요하니 겨울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상담을 받아보는 것도 좋겠다고 조언해 주신 것이 생각났지만 그 당시는 '과연 시간이 날까.' 싶어 흘려보냈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기회가 생겨서 떨리는 마음으로 상담을 받고자 신청하였다. 아무리 무료상담이라 하더라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상담을 받기로 선택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길은 여간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다. 나중에 나를 보러 오는 내담자들의 발걸음이 헛되지 않도록 나를 갈고 닦아야 하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하였더랬다.
내담자 경험 얘기를 하려니 아버지 얘기를 조금 해야 할 것 같다.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상담 대상이 '환자의 가족(보호자)'이다. 내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병상에 누워계신 아빠가 계시는데 24년 올해로 11년 차쯤 되었다. 시간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물처럼 부지불식간에 이리 지나있다. 간성혼수로 이성을 잃으셨던 아버지를 데리고 그 길로 엄마는 전라도 시골에서 아산병원으로 달려와 아버지를 입원을 시키셨다. 아산병원 응급실에서 꼬박 밤을 새우고서야 응급실의 배드하나 배정받고 한 달간 긴 검사들을 끝으로 2009년도에 막내 남동생이 기증을 하여 간이식을 받으셨다. 그리고 3년 동안은 새 생명과 새 인생을 얻은 줄로만 알았다. 본인도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들도. 하지만 3년 만에 다시 이름도 어려운 희귀병 진단을 받으시고 사지가 마비되어 지금까지 쭉 일어나시질 못하신다. 뇌의 회백질이 점점 수축하면서 쪼그라드는 병으로 딱히 알려진 치료법은 없다고 아산병원과 서울대병원에서 확인을 받고 그 이후로 보훈병원에 입원 중이시다.(아버지는 뒤늦게 유공자 인정을 받으셨다.)
엄마는 해오시던 식당일을 완전히 접으시고 24시간 병원에서 먹고 자면서 아버지를 간호 중이시다. 나와 우리 형제자매들은 주말이면 엄마를 대신해서 아빠를 간호하기도 하고 간혹 간병인을 쓰기도 하지만 매일 고생하시는 엄마의 노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엔 입원해서 누워계신 아빠를 볼 때도 울었고 안 볼 때도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났다.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는지를 오래 생각했었다. 아빠를 간병해 드리고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면 항상 가슴께가 얹힌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하였다. 3년쯤 지나자 나는 누구나 집안에 아픈 사람 한 사람쯤은 다들 있지 않나 하는 합리화도 하면서 아픈 아빠를 나의 현실로 받아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밤낮으로 아빠 곁을 지키시는 엄마가 점점 안쓰러워졌다.
죄책감의 진짜 얼굴은 엄마에 대한 연민
상담사님께 첫 회기에 나는 다소 자신 있게 말했다. 아버지가 오랜 병중이시긴 해도 나는 지금 내담자 경험이란 것을 해보려고 신청을 했으며 우리 아버진 이미 오랫동안 병중이시며, 그러니까 아픈 사람을 가족으로 둔 이런 상황에 아주 익숙해진 환자의 가족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상담사는 내게 이번 상담은 환자 가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이해하는 구조화된 상담과 비구조화된 상담의 중간쯤이라고 말씀하셨다. 3회기 만을 신청한 내게 5회기까지 채워도 좋다고 하셨다.
상담사와 마주하고 대화를 하면 할수록 나는 울컥울컥 올라오는 엄마에 대한 죄책감에 대해 난감해졌고 상담사는 내게 그 감정이 어디서 오는 것 같냐고 스스로 탐색하길 바랐다. 나는 광주에 자주 내려가서 엄마를 돕지 못해 미안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가끔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남양주에 바람이라도 쐬러 나간 사이 엄마에게 전화가 오면 나만 쉬러 나온 게 죄스러워서 마트에 장을 보러 나왔다고 거짓말을 할 때도 있다고(자주) 말했다.
광주에 한 번씩 오갈 때면 늘 체력이 약한 나는 금방 에너지가 소진되어 힘든 편이다. 요사이는 더 자주 내려가는 게 힘이 든다고 했더니, 광주 내려갔을 때 엄마가 내려오느라고 고생했다고 하시면 뭐라고 대답하냐고 상담사가 내게 물었다. '고생은 무슨, 엄마가 더 고생하지.' 이건 늘 내가 엄마에게 하는 말이다. 상담사는 내게 왜 본인 몸이 힘든 것은 힘든 걸로 안쳐주냐고 물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만다. 고생하시는 엄마 앞에서 내 몸 하나 피곤한 것은 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철이 들면서는 내가 힘든 것들은 늘 힘든 것도 아니며, 내가 슬픈 것은 슬픈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해 왔다. 그리고 나도 미처 몰랐는데 늘 부모님께 순종하고 힘든 것들을 많이 내색하지 않고 자라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상담사님은 내게 약간 웃어 보이면서 부모님께 본인을 아이처럼 보살펴주는 역할을 왜 허용하지 않았냐고 하신다. 내려오느라고 고생 많았다고 하시면, 그렇지? 나 고생 많았지? 하고 응석 좀 부리지 그랬느냐고. '그분은 저보다 더 힘드니까요. 아마 우리 형제자매들은 다 그럴 거예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 고생하시는 것들을 눈으로 늘 봐왔기 때문에 아무도 힘들다, 못한다 투정 부리는 동생들이 없었어요.'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상담사님의 해석으로 뭔가 마음에서 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빠가 처음엔 금방 털고 일어나시길 바랐지만 우리의 소원들은 점점 작아졌다. 제 힘으로 걷는 것은 이제 꿈도 못 꾸지만, 제 손으로 식사를 하시면 하고 바랐다가, 좋아하시던 믹스커피 한 숟갈이라도 목으로 넘기시길 바랐다가 이젠 그저 하루를 잘 버티시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그러기를 10년이 넘었는데 어쩐지 큰 딸인 나는 아빠도, 엄마도, 나도, 우리 가족 중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이 상황에 대해 오로지 엄마에게 그 짐을 지운 것 같아 늘 마음이 무거웠다.
엄마 인생은 불행해라는 비합리적인 신념
상담사에게 내가 말했다. 엄마가 불쌍하다고. 식당일로도 충분히 고생하셨던 엄마는 이제 아빠의 병간호로 옴짝 달짝 못하는 신세가 되셨다고. 병실은 평생을 고생하시는 불쌍한 엄마를 가두는 창살 없는 감옥과 같다고. 엄마는 현재의 엄마의 욕구가 희망을 억누른 채 나아지리라는 희망도 없이, 언제 끝날지도 모를 간병에 현재를 저당 잡혀 살고 있다고. 엄마를 향한 죄책감의 근원은 엄마를 불쌍하게 여기는 내 마음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엄마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하고 묻는다. 살림에, 직장 생활한답시고 자주 내려가보지도 못하고 간병에 크게 도움도 못 드리는 것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 크면서도, 그러면서도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해 힘든 나는 마음만 그럴 뿐이고 말로만 엄마를 걱정하고 위로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의 무력한 마음을 엄마에게 투사했었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님에게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나의 무력감을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웠나 보다. 슬픔의 표현이나 나의 눈물도 상황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고 점점 더 마음을 표현하지 않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나의 무력감의 뒷면에는 아빠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있었다는 것 또한 상담을 통해 느끼게 되었다.(아빠에 대한 꿈을 자주 꾸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가 미워져서 그랬던 것 같다) 상담사에게 아빠에 대해 소개할 때 자수성가하시고, 책임감이 강하시고, 가족에게 헌신하셨던 분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었다. 술을 많이, 자주 드셨고, 가족에겐 폭력을 행사하진 않았어도 술만 드시면 집안 장롱이며 전화기, 티브이 같인 집기들은 자주 부서졌으며 늘 어린 우리들에게 큰 소리로 몇 시간이고 호통치시는 무서운 아버지였다는 것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나의 아빠는 그럭저럭 괜찮은 아빠였다고 그동안 믿고 싶었던 나의 믿음에 살짝 금이 가는 것만 같았다.
코로나 이후로는 병원 출입이 어려워지고 겨우 한 달에 한번 내려갈까 말까 했던 것도 뜸해지고 그럼에도 간혹 어쩌다 하게 된다 해도 할 때마다 아빠 간병은 늘 힘들었다. 일주일에 세 번은 투석실로 옮겨야 하고, 엄마 손목과 어깨에 무리가 오게 하는 아빠의 육중한 덩치도 미웠고, 매번 식사를 갈아 튜브에 끼워 드리거나 새벽에도 수십 번씩 가래와 소대변 체크 등 모든 수고로움을 만들어내는 이 상황이 싫었었다. 아빠는 아직 우릴 떠날 준비가 안된 것이라고 애써 돌려 생각은 하면서도 살아있다기보다는 그저 버텨는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도 미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확실히 아빠를 원망하고 있었다. 엄마의 불행의 근원이 아빠인 것만 같았다.
말하는 내 입술이 일그러지고 눈물이 앞을 가리자 상담사님은 내게 책상 위에 마련된 티슈를 건네셨다. 그녀는 내게 휴지를 건넬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하셨다. 표현은 못했지만 세상에 이렇게 따스한 말이 또 있을까 싶었다. 어떤 소중한 사람이 나의 연약해진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고 이 기분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졌다. 멀지 않은 미래에 나도 그렇게 내담자를 대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죄책감 다스리기
상담사님은 내게 물었다. 엄마가 정말로 불행해 보이시냐고. 몸이야 조금 힘드시겠지만 이것도 본인이 선택한 일 아니겠느냐고. 엄마 앞에 놓인 많은 선택지 중에 그나마 가장 나은 것, 그나마 가장 최선인 것을 엄마는 선택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고 하신다. 엄마는 아빠를 요양병원에 보내실 수도, 간병인을 하루 종일 세울 수도 있었지만(유공자 연금이 나와 경제적으로 힘든 것은 아니니)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온전히 본인 눈앞에 두시길 원하셨다. 어쩐지 엄마는 그나마 최선인 것을 선택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는 내게 엄마는 식당일보다 편하다고 늘 내게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것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는 나름대로 괜찮은 삶을 살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방 간병 식구들은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매일을 살고 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있었다. 나만 혼자 불행의 색안경을 끼고 그들이 불행하다 안쓰럽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빠가 계신 보훈병원 똥방(대소변을 다 간병인이 처리하는)에서 엄마처럼, 남편이라는 이유로 혹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여러 명의 보호자이자 간병인들이 계신다. 엄마를 포함해서 그들은 지쳐 외로운 마음이 들 때마다 서로 먹을 것을 나누고 급한 볼 일이 있을 땐 서로의 환자도 잠깐씩 봐주면서 기댈 곳을 찾는다. 다들 병원 간병인 생활엔 이골이 난 분들이라 돌아가면서 가끔은 피자며 치킨 등 음식 배달도 시키고, 가끔은 손수 찌개며 조림도 병원에서 만드셨는데 누구는 돈을 대고 누구는 냄비나 김치를 가져오고 누구는 재료를 사 와 고등어찜을 하면 그것으로 늘 심심한 병원 밥을 대신해서 성대한 파티가 된다. 병문안을 갔다가 서로서로 먹을 것을 서로 나누는 모습을 보던 내 딸아이는 돈이 없으면 병원에 입원하면 된다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일기장에 적었다.
내 환자가 가래 끓는 소리로 밤새 잠을 뒤척이더라도 아침이면 같은 방 간병인 아주머니는 내가 아저씨 때문에 못 잤다면서 한바탕 성도 내고 애교도 부리며 다시금 활기를 되찾는 곳이다. 그분들을 보면서 인생이란 기적을 바라는 희망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절망도 인생이고 매일의 절망에서 한송이 빛처럼 내리는 미소들도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미워지는 아빠에 대한 나의 마음들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무력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엄마에게 내 마음을 투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불행하다고 되레 짐작하고 판정 지었을지도 모른다. 정작 본인은 매일 의미 있는 하루를 살아내는 중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내담자 경험으로 상담에 대해 생각하기
1-2 회기에 난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3회기에서 상담사님께 지금까지 할 말은 다 했는데 또 뭐가 남았을까요? 오는 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을 했다고 했더니 왜 나더러 미리 그런 걱정을 하느냐고 하신다. 상담은 대게 내담자가 이끌어간다고도 덧붙이셨다.
상담을 통해 그동안 나는 인생은 누구에게나 힘든 전장이며, 누구에게나 아픈 가족이 한 명쯤은 있는 거라고 그래서 힘든 내색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빠의 병원 생활이 길어질수록 우리들은 조금씩 지쳤고 그 지침에 조금씩 더 익숙해졌고, 익숙해질수록 서로 힘들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던 것 같다. 가족끼리 서로의 마음을 지레 짐작하게 되었고 참든지, 합리화하든지, 투사나 부인, 억압을 통해 왜곡하든지 간에 힘든 마음들을 표현하는 법을 잃었구나 싶었다.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점점 더 짐작조차 하지 않으려 하였고, 아무도 궁금해진 않았고 나 조차도 몰랐던 나의 마음들에 작은 조약돌하나 던져지니 파동이 깊게 일어난다.
상담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몰랐던 나를 이해하고 조금씩 마음을 열기로 하는 것, 내 감정들에 이름을 붙이고 말해 보기로 하는 것, 미세한 떨림을 자각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돌보기로 하는 것 말이다. 나도 몰랐지만 나도 이해받기를 원한 것 같았다. 내가 이해받기를 원했던 강렬한 느낌과 상담사님의 해석과 반영으로 일어나는 작은 파동들은 나중에 나와 같은 내담자를 만날 때도 필히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미래의 공감 전문가로서 기꺼이 많은 경험 앞에서 겸손해지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뚫고 나아가기
살면서 점점 우리는 할 말은 감추고 그러다 느껴지는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러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조금씩이라도 할 말은 좀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해봅시다. 연습. 그래야 내가 건강해질 수 있다. 안되면 뭐다? 상담받으러 가세요. 상담은 가장 적극적인 자기 돌봄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상담사님이 내게 자신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뚫고 나아가라고 하셨는데 과제를 잘 풀어봐야 하겠다.
우리 아이의 유치원 때 일화가 기억에 남아 이것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출퇴근을 하는 통에 우리 아이는 유치원에서 늘 꼴찌로 집에 가는 아이였다. 내가 집에 와서 '엄마가 일하고 와서 힘들거든.' 하면 우리 딸은 "엄마! 나도 유치원 다녀와서 힘들거든." 하고 야무지게 대답하곤 했었다. 그때 넌 엄마보다 건강했구나. 마음을 마음껏 표현했던 걸 보니.
우리도,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거 맞잖아요.
❤️ 긴 글 읽어주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저를 상담해 주신 교수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