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대학원 후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3학 차에 들어서서 대상관계이론을 배우고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쓰고 있어요.
오토 컨버그는 대상관계이론을 심각한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사용했다고 해요. 특히 경계선 성격장애자들의 원인과 특징에 대해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많은 부분들이 그의 연구, 초기 대상관계에서 나타나는 병리적 혼란에 관한 연구에서 기초한 것이라고 합니다.
Kernberg의 “양극 정신내적 표상들”(대상관계 단위체)
컨버그는 개인의 내면 심리세계 안에 구조가 형성되는 데 구조(영속하는 심리패턴)는 환경 안에서 존재하는 사람과의 초기 관계를 아동이 내면화시키는 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 관계는 대게 엄마와의 관계를 말하며, 이러한 관계는 대상관계 또는 내면화된 대상관계로 내면화하게 된다. 이 내면화된 대상관계는 의식적으로나 내적으로 확장되는데, 외적으로는 자기밖에 있는 사람들과 복잡한 관계로 확장되며, 내적으로는 전통적인 원초아, 자아, 초자아 구조로 발달하게 된다. 아이는 엄마와의 관계, 곧 환경 안에 있는 어떠한 사람과의 관계는 내면화된 대상관계로서 심리적 내면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세 부분을 지닌 하나의 단위가 된다. 이 세 부분은 환경 안에 있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 대상과 교류하는 자기에 대한 이미지, 상호 교류 시 존재하는 욕동의 영향하에 만들어지는 대상 이미지와 자기 이미지를 채색시키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유쾌하거나 좌절스러운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즉 내면화된 대상관계의 단위체들은 자기 이미지, 대상 이미지, 그리고 이 둘 이미지를 연결시키는 정서적 색채(좋은 혹은 나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구조 속 표상들은 처음엔 ‘전적으로 좋은’ 것들과 ‘전적으로 나쁜’ 것들로 시작하다가 전체적인 자기 표상과 전체적인 중요한 타자의 표상으로 통합된다. 더불어 초기의 자기 표상과 대상표상에 대한 원시적인 감정들도 차츰 구체화되는데 이러한 통합과 구체화를 이루는 대상관계 내재화 과정은 내사, 동일시, 자아정체감 형성 순으로 이루어진다.
내면화 체계의 서로 다른 발달유형(내사, 동일시, 자아정체감)
▶ 내사
발달에서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구성되는 첫 번째 내면화 체계를 내사라고 하는데 이 체계에서는 자기-상과 대상-상은 상당히 불안정하고 조절되지 않은 감정상태로 그 원시적인 감정들에 대해 누가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없이 초기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들을 경험한다. 유아는 이때 경험하는 감정들이 통째로 삼켜져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분류한다. 유아는 처음에 좋은 경험은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경험은 내보낸다. 즉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경험은 좋은 어머니나 나쁜 어머니 상으로 내사되며 이 두 분리를 유지하기 위해 방어적인 시도로 분열이 나타난다. 이 시기의 분열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 동일시
내사보다 더 높은 내면화의 형태로, 생후 10개월부터 2세까지 진행되는데, 아동이 사람들과 상호작용 속에 있는 역할 양상을 지각적으로나 인지적으로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나타난다. 동일시는 실제적인 대상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그 속에서 개인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주체로서 경험한다. 자신과 타인의 역할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 이미지와 타인의 이미지의 변별이 더욱 분명해진 수준으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자기와 타인의 이미지가 더욱 분명하게 변별됨으로써 아동은 더 광범위한 정서를 인식하는 능력이 발달되고 이로 인해 다양한 정서의 조절이 가능해진다. 대상관계가 이렇게 성장함에 따라 분열을 통한 방어의 필요성이 감소되고 자기와 타인의 구별은 더욱 뚜렷해진다. 그러나 아직도 정서적인 통합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러한 과정이 진전되면서 아동은 차츰 동일시된 이미지와 내사된 이미지를 통합하는 능력을 성취하게 된다. 이것은 자아가 다른 종류의 경험을 종합하고 통합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이제 아동은 내사와 동일시의 결과 생긴 긍정적인 자기 이미지와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들을 통합하여 다양한 가치와 기능을 포함하는 일관된 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전체적인 대상표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전체적인 자기 표상의 총합으로서 자기가 형성된다. 긍정적 자기 표상과 부정적 자기 표상이 통합됨으로써 자기의 측면이 수용할 수 있는 “나”와 수용할 수 없는 “나”로 지각되지만 둘 다 여전히 “나”로 지각된다. 이 상황에서 수용할 수 없는 “나”는 이제는 분열되지 않고 억압됨으로써 자아 정체를 유지하게 된다. 컨버그는 억압할 수 있는 능력을 건강한 사람의 특징으로 보았다. 이렇게 형성된 자기는 이제 중심적인 주도력을 발휘하여 일관성 있게 행동을 안내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 자아 정체감
자아 정제성은 내면화 과정의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자아 정체성이란, 자기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내사와 동일시를 통해 형성된 대상의 이미지를 통합함으로써도 성취된다. 이렇게 부분적인 내사와 동일시의 대상 이미지들이 일관된 대상 표상으로 통합됨에 따라 그것은 외부 세상을 일관되게 표상하게 된다. 이 자아정체성의 과정으로 자기와 대상의 이미지가 통합되는 것은 아동기 내내 계속적으로 일어난다. 이 단계의 내면화 과정에서는 자기 표상과 대상 표상의 변별과 통합이 촉진되는 것이며, 이 과정은 개인 내의 여러 자아 정체가 전반적인 조화를 이룰 때까지 계속된다. 컨버그는 일단 아동이 자아정체성을 성취하면 심한 성격장애가 예방된 것으로 믿었다. 자아 정체성이 성취되기 위해 자기와 대상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부정적인 이미지보다 우세해야 된다. 자기 표상과 잘 분리된 대상 표상이 통합되어 있을 때 스트레스하에서 개인을 덜 힘들게 한다. 왜냐하면 그런 대상 표상을 지니고 있는 개인은 스트레스를 주는 좌절 상황에서 자신을 달래주는 대상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스트레스와 좌절을 주는 인간관계에서 분열에 의한 방어를 하기보다 대상항상성을 유지하면서 긍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경계선 성격장애인은 이런 기억을 떠올리는 능력이 결핍되어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신을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져 있다. 자아 정체성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자기 표상과 대상 표상이 복잡하고 풍부한 사람 또한 인간관계에서 좌절을 견디는 능력이 더 크다.
Kernberg의 제시하는 경계선 환자들의 병인, 대상관계, 방어로서의 분할
▶ 병인
경계선 성격장애자들의 어린 시절, 이들의 정상적인 통합을 방해한 것은 과도한 공격성 또는 좌절감이다. 이들은 대게 생후 2-3년 동안에 과도한 좌절과 강한 공격을 경험하였는데 이런 좌절을 경험해야만 했던 어린아이는 좌절로 인해 극도의 분노와 공격성을 느끼고 이 공격성을 부모에게 투사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 들며, 결과적으로 부모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게 된다.
이것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오는 데, 우선은 ① 부모의 이미지가 위험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② 이후에 아이가 성장하면서 성관계를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아동이 오이디푸스 이전단계(2-5세)에서 과도한 공격성과 증오와 씨름하게 되면 아동의 본능적인 발달 과정이 왜곡된다. 이른 시기에 공격성을 경험하게 될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이디푸스적인 갈망(혹은 이성에 대한 갈망)으로 해결하려고 하나 대게 쉽게 실패하고 결과적으로 혼란스러운 성생활과 서투른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성관계 자체를 위험하게 생각하게 됨)
▶ 왜곡된 대상관계
경계선 성격장애자들은 자기 및 대상과 연관하여 좋고 나쁜 이미지를 통합하지 못한다. 서로 상반되는 자기 이미지와 대상 이미지를 통합할 수 없기 때문에 견고한 자아의 핵을 중심으로 통합된 자기 개념을 만들지 못하며 통합적인 대상관계를 이룰 수 없고 대상항상성 또한 이룰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부분대상관계를 가진다. 이들은 유약하고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자아를 보존하기 위해 분리 및 다른 원시적인 방어기제들을 사용하게 된다. 자기와 대상의 표상이 통합되지 못하면 대상항상성이 형성되지 못하여 자기 정체감 형성, 감정조절, 공감능력의 발달, 초자아의 발달 등에서 장애를 초래하고 심한 방어적 분열과 투사적 동일시, 외적 대상에 대한 지나친 의존 등 인간관계 능력을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 방어로서의 분할
경계성의 특징적인 방어기제는 분할이다. 분할은 임상적으로 갈등의 상반된 측면을 표현할 때 외적 행동과 내적 경험 안에 존재하는 모순을 부정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교체적으로 드러난다. 또는 원시적 충동이 튀어나오는 위급한 상황에서 선택적으로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사람에 대한 감정이 ‘전적으로 좋음’에서 ‘전적으로 나쁨’까지 극단을 오락가락하며 갑자기 그것이 역전되기도 한다. 이런 모순적인 자기 개념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분할 기제 때문에 일어난다.(요약: 극단적인 감정과 모순적인 자기 개념이 오락가락 증상) 분할은 원시적인 이상화와 초기의 투사 형태와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투사적 동일시 안에서는 자신의 충동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성을 먼저 투사시켜 위협적 대상을 통제한 후, 그 대상을 자신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노력이 뒤따른다. 이는 자기 이미지와 대상 이미지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발생한다.
Kernberg의 분할(splitting)에 대한 개념
분할은 발달 중에 발생하는 방어적인 행위인 동시에 정상적인 기능이기도 하다. 이 분할에 의해서 자아는 자기 안에 있는 것과 대상 안에 있는 것의 차이와, 자기와 대상 사이의 차이를 알게 된다. 방어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분할은 무의식적인 환상 속에서 원하지 않는 측면을 떼어 내 버리거나 위협적인 대상을 여러 개로 나누어 다루기 쉽게 한다. 극단적인 사례로는 지킬 박사가 자신의 인격 중 위협적인 측면인 하이드를 떼어내 없애 버리거나 억압시켜 버리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덜 극단적인 경우의 예로는 한 인간 안에 두 가지의 측면이 공존함을 보지 못하는 경향을 들 수 있다. 컨버그는 이 분할의 개념을 사용하여 초기 발달 중 자기 표상과 대상표상에 각기 놓고 좋고 나쁨의 구분이 형성되는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또한 그는 분할을 경계성 성격의 특징적인 심리기제로 이해한다. 아이에게 좋은 경험은 좋은 감정 영역을 만들며 서로 연결되고 조직화되면서 자아 도는 초자아라 불리는 심리구조를 형성하게 도와주지만 나쁜 경험들은 좌절된 감정을 양산한다. 분리에 의한 방어는 나쁜 감정을 서로 떼어 놓고 이 결과 파편화된 내면세계 속에서 불안이 아동의 모든 경험을 오염시키지 못하고 좋은 영역의 감정들을 파괴하지 못한다. 불안 강도가 너무 세면 심리구조가 통합되는 과정이 방해를 받고 그 결과 인격의 중요한 부분이 다른 부분들로부터 고립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의 내면에는 각기 다른 경험의 영역들, 다른 자아 상태, 각기 다른 하위 자기들로 쉽게 파편화될 수 있다.
컨버그 이론을 통한 나의 이해
어린 시절의 내게 엄마와 아버지에 대한 내적 표상은 확실히 ‘좋음’과 ‘나쁨’이었던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나서 부모님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생겼지 그전에는 늘 내겐 엄마는 좋음이고 아빠는 나쁨이었던 것 같다. 3 살배기 어린 아기를 아빠 팔뚝에 눕히면 귀신같이 아빠인 줄 알고 울어 재꼈던 어린 나는 학창 시절에도 주욱 아빠는 그저 무섭고 무뚝뚝한 아버지일 뿐이었다. 우리에게 늘 상냥하게 대하셨던 엄마는 늘 좋음이었고 항상 무섭고 호통치며 술에 취한 날이면 언행이 거친 아빠는 늘 내겐 ‘나쁨’이었다.
아빠에게는 늘 하고 싶은 말은 없었고 그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와 ‘학교 다녀왔습니다.’, (아빠 식사하세요가 주말이면 추가되긴 했지만) 딱 2 마디면 하루 인사가 전부였다. 그런 내게 아빠는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었다. 난 지금도 병상에 누워 계신 아빠가 불쌍하고 짠하지만 그것이 애정의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직도 아빠를 보면 불쌍했다가 미웠다가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에 비해 동생들은(그들의 성격 탓인지 잘 모르겠지만) 누워계신 아빠에게 말이라도 살갑게 하는 편이고, 특히 둘째는 본인이 학창 시절에 부모님 속을 많이 썩여서 그런지(내가 봤을 때) 아빠 간병도 자주 도맡아 하는 편이다.(싱글이라 여유가 있는 편이긴 하지만 육아로 고생하는 다른 동생들에 비해 야무지게 엄마 보조를 할 때가 많다.)
학창 시절에 가끔씩 아빠는 위트도 넘치시고 기분이 좋을 때는 농담도 잘하시고 많이 웃으셨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게 항상 그런 모습인 것은 아니어서 그런 아빠의 모습들은 아빠의 무섭고 무뚝뚝한 표상들에 의해 힘을 잃었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80프로 이상은 어두운(무섭거나 아프시거나)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아빠로 인해 생겨난 나쁜 경험들과 그 경험들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감정들이 왜 내게 전부인 것처럼 나를 망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볼 때가 많다. 힘든 아빠를 견디면서 가장 많이 힘들었을 엄마가 적어도 우리에게 아빠에 대한 부정적 감정들, 원망하는 마음들, 하소연하고 신세 한탄하고 싶은 모습들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대게 아빠가 자기 멋대로이거나 폭력적인 경우엔 부부 사이가 좋지 못하고 그런 경우 대부분은 엄마는 늘 아빠와 세상에 대해 화가 나고 그 화풀이 대상은 아이들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나의 아빠가 늘 제멋대로인 것은 아니었고 술을 드시지 않은 한 엄마와 아빠 사이는 늘 좋은 편이었던 것, 그래도 엄마가 아빠를 많이 애정으로 대하셨던 것, 아빠로 인해 분명 힘드셨을 텐데도(지금도 병간호로 인해 힘든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식들에게 한 마디 아빠를 비난하거나 본인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을 원망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엄마의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라는 것은 순전히 나의 투사이다. 엄마는 자신의 인생을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은 없다. 나는 항상 현재의 엄마와 엄마애 대한 나의 감정을 투사되어 항상 괴로운 편이다.) 우리가 되려 엄마 앞에서 매일 술만 드신다고 아빠 흉을 봐도 엄마는 ‘너네 아빤 그래도 바람은 안 피운다’며 엄마 밖에 모르는 분이라며 두둔하셨었다. 엄마 천성이 그러하셨는지 몰라도 늘 긍정적이셨다. 이제야,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나는 그렇게 컸다. 그리하여 나를 비롯해 동생들은 아빠가 아주 다정하고 살갑고 좋은 아빠는 아니라도, 무섭고 힘든 분이긴 해도 꼬박꼬박 우리들을 아침마다 학교에 태워다 주는(시골이라 버스가 안 다녀서), 책임감 있고, 뭐든 잘 고쳐서 능력도 있는, 그만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아빠로 여기며 살아온 것 같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도 사람들에게 엄마를 소개할 때면, 우리 엄마는 ‘현모양처’라고 말하곤 했었는데, 존경하는 마음 절반 그리고 엄마 인생에 대한 연민과 동정하는 마음이 절반이었다. 우리들은 그러한 엄마를 이해하고(가끔 이해하지 못할 때도 분명 있지만) 존경한다. 그리고 늘 평생을 아빠 옆에서 고생을 하시는 엄마의 노고를 십분 이해하고도 남기에 나와 동생들 역시 엇나가지 않고 다들 일찍 철이 들었으며 지금껏 결혼도 해서 아이도 낳으며 각자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잘 해내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나 동생들도 그만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자식들로 말이다. 이만하면 꽤 잘 살아내고 있는 것 같다. 갑자기 그리 믿고 싶어 진다.
참고문헌
1. 대상관계 이론 입문, Lavinia Gomez 저, 김창대 외 역, 학지사
2. 대상관계이론과 자기심리학, Michael St. clair 저, 안석모 역. 센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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