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코밀 Nov 12. 2024

말러에게 배우다

분리개별화를 통한 대상항상성 키우기

상담대학원 후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3학차에 들어서서 대상관계이론을 배우고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쓰고 있어요.



말러는 인간 발달을  분리-개별화의 개념을 축으로 자폐와 공생단계 및 분리-개별화의 단계로 설명하고 있어요.


자폐단계와 공생단계

   

자폐단계는 출생 직후부터 생후 3-4주의 시기를 말하는데, 일차적 자기애의 특징을 갖고 이는 시기로 유아는 폐쇄체계 존재로 아직은 타자 인식 없이 신체 감각만을 인식하는 단계이다. 엄마의 젓 가슴을 찾지만 외부 대상을 인식하기보다는 반사적인 현상으로 환경과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생리적 긴장을 늦추어 안정감을 유지하려고 하고 본능적인 쾌락의 원리로 움직이는 시기이다.      


공생단계는 생후 5주 – 5, 6 개월까지를 말하는데 이제 분화가 시작되기 전 단계로 유아가 몸 전체를 통해 경험하는 접촉, 지각적 경험 특히 피부를 통한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기로 움직이는 얼굴 및 눈마주침은 미소 반응을 가져온다. 아기가 갖는 내적 감각들은 자기의 핵심을 형성하여 추후 자기감이나 정체감 형성에 영향을 준다. 엄마의 에너지가 온통 아기에게 집중되는 모성몰두 경험이 일어나는 시기인데. 자기의 욕구를 총족시켜 주는 엄마의 존재를 희미하게 인식하면서도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엄마에 대한 애착을 경험하며 엄마와 마치 하나라는 느낌을 가진다. 이러한 느낌은 만족감을 주는 대상관계형성을 가능하게 하고 자기신뢰 및 자존감의 바탕을 이루므로 중요한 단계라 할 수 있다.     


분리-개별화 단계      


연습단계는 생후 10- 16개월 사이로, 아이는 네 발로 기어다니면 어머니와 신체적 분리 시작하는 시기이다. 심리적 탄생의 진정한 시작이라 볼 수 있는데, 직립보행이 시작되고 세상에 대한 탐색을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기지’역할을 하는 단계이다. 유아는 세상을 탐색하면서도 정서적 재충전을 위해 엄마를 확인하는 단계로 떨어짐과 되돌아옴이 반복되는 시기이다. 유아는 보행을 시작하면서 자기능력의 도취, 자기애의 정점을 이룬다. 엄마는 아이와 정서적 접촉을 유지하면서 아이와 분리 노력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일부러 밀쳐내거나 엄마의 필요에 따라 아이를 안아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재접근의 시기는 생후 16-24개월의 시기로 심리적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 시기이다. 혼자라는 인식으로 분리불안을 경험하고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인식하게 되면서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전능감이 붕괴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엄마를 필요로 하면서도 분리-개별화되고 싶은 욕구 간의 지속적인 갈등이 나타난다. 엄마가 자신의 욕구를 항상 만족시켜주는 존재가 아니며 엄마와 자신이 분리된 개별성을 지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엄마의 좋고 나쁨을 정신적인 이미지로 통합시킨다. 이 시기에 건강한 부모는 아이에게 독립된 활동을 허용하면서도 균형감있는 정서적인 지지와 안정성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상항상성의 개념


엄마가 눈앞에 있든 없든, 자기를 만족시키든 못하든 간에 엄마에 대한 일정하고 고정된 이미지를 간직할 수 있는 능력을 대상항상성(object constancy)이라고 한다. 대상항상성은 약 2세정도에 시작되어 3세가 될 때까지 지속되는 데, 이 시기의 주요한 과제는 일생을 통해 지속되는 개별성을 획득하고 일정한 수준의 대상항상성을 얻는 것이다. 엄마에게 떨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재접근기의 과정의 반복하면서 자신의 개별성과 대상에 대한 대상항상성을 발달시킨다. 이 시기의 아이는 좋은 표상과 나쁜 표상을 통합시키기 시작하고 자신에 대한 좋은 표상과 나쁜 표상을 통합시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을 충분히 경험해야 엄마에 대한 안정적인 내적 표상을 발달시킬 수 있고 추후 좌절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개별성과 대상항상성의 발달은 재접근기의 중반부터 시작되지만 이후 삶 전체를 통해 발달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가장 먼저 오이디푸스 갈등기로 이어지고 잠복기와 청소년기를 거치고 이후 대학이나 군 입대로 다시 집을 떠날 때 분리를 경험하게 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질 때, 이직을 하거나 이사, 자녀들이 떠날 때, 질병으로 고생할 때나 은퇴, 사별 및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때 등 모두 대상항상성과 자기 개별화의 문제가 두드러지는 때이다.           


말러의 이론을 통한 나의 이야기


대상관계이론을 배우고 난 다음부터는 어쩐지 엄마가 했던 나와 동생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너는 7살부터 철이 들었지. 너희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같이 다 착했단다,’라던가, ‘어느 하나 엄마, 아빠 속을 썩이는 자식이 없었지. 외할머니도 망나니 같은 이모들 자식들한테는 떠들지 말라고 소리치고 미워했어도 너희들은 얌전해서 하나같이 다 예뻐했지.’라던가 하는 말들 말이다. 예전엔 그냥 그랬나보다 하는 것들이 이제 와서는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고 그때의 상황이나 맥락이라던가 그리고 부모님의 상황 같은 것들도 조금씩 더 이해가 되기도 한다.      


나와 막내 남동생은 무려 13살 차이가 난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막내 남동생은 고작 한 살 정도였던 것 같다. 딸 넷 다음에 아들로 태어난 막내는 지금껏 우리 집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동안은 나도 참 관심은 없었지만 이제 하나 둘 씩 이해가 되려고 한다.      


그때도 우리집은 식당이라 바빴는데(엄청 장사가 잘 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직원들도 여럿 있었다). 엄마가 회상하시기를, 막내 남동생이 바쁜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제발 나와 놀아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놀라달라 떼를 쓴 것을 보니 아마 막내는 두세 살 혹은 그 이후였겠지 싶다. 아수라장인 식당 안은 아이에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지. 그러니 그렇게 바쁜 엄마를 따라다니면서 놀라달라고 했을 테지. 그저 그런 어릴 적 일화가 이제는 그냥 들리지가 않고 어린 남동생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사리 같은 아들 손을 뿌리치던 엄마도 조금은 아쉬움이 크셨겠지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환경에서 컸던 나와 동생들은 당연히 다 착했거나 착할 수 밖에 없었거나 혹은 알아서 속은 썩이지 말아야 하는 것을 이제야 이해를 하는 것이다. 나와 동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지녔을 전능감을 너무도 빨리 붕괴되는 것을 경험하곤 그래서 남들 보다 일찍 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와 아빠가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는 자연스러운 진리를 너무 일찍 알아버린 것 같다. 환경에 순응하는 아이는 늘 착할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나는 내 아이가 15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을 했다. 회사가 멀어 남들보다 일찍 육아휴직에 들어갔더니 복직을 하려고 했을 때는(그 당시 육아휴직인 1년이라) 아이가 아직 돌이 되지 않아 결국 일신상의 휴직을 몇 개월 더 쓰고 나서 출근을 하게 된 셈이었다. 어린이집에 아침마다 아이를 떼어놓고 올 땐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아이 때문에 늘 눈물 바람이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 어린애를 떼어놓고 출근해야 하나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싶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어린이집 선생님들 말씀을 들어보면, 일단 엄마가 가고 눈 앞에서 안 보이면 아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지낸다는 것이었다. 대상관계 이론에서 배운 예시처럼 재접근 시기의 아이는 분열 상태였나보다. 좋았던 엄마가 떨어지려 하니 울고 불고 난리를 치다가 (눈 앞에 당장 안 보이면 잊어버리고) 엄마 대신 자신을 돌 봐줄 선생님은 다시 좋게 보이는 그런 현상 말이다. 당장 엄마가 사라지면 일단 선생님들에게 착 붙어서 열심히 놀아주었던 아이가 참 고마웠다.   

  

아이가 5살 때는 유아원에서 유치원으로 옮겼고 종일반을 하면서 퇴근하고 저녁 7시에야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도 여전히 서울에서 인천까지 출퇴근을 하느라 정말 고역이었는데  아이는 늘 꼴찌거나 아니면 꼴찌에서 두 번째 정도로 늦게 집에 가던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근하고 아이를 픽업하러 가면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기다렸잖아.’하는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늘 늦게 데리러 가는 미안한 마음으로 아이를 만나러 갔는데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던 아이가 난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었다. 엄마가 늦게 온다고 매번 볼 때마다 울었다면 더 가슴이 아팠을텐데 나는 잠시 울지 않고 나를 반겨주는 아이 마음 뒤에 숨었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잠시 모른 척을 했던 것 같다.


아이를 데리고 집에 오면 배가 고플까봐 얼른 저녁을 차려주고 싶은데도 집에 와서야 그리운 엄마 품이 실감이 나는지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 30분은 내 품에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다.  한 30분쯤은 충분히 안아주고 책도 보여주고 시간을 보내주면 자연스럽게 알아서 떨어져 주었다. 그러고 나면 나는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땐 뭔가 아이의 마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던 시기였지만 집에 돌아오면 어쩐지 이렇게 충분히 엄마 품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고 그렇게 해주려고 노력했던 같다. 대상항상성이라는 것은 전 생애에 걸쳐 발달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이는 엄마와 늘 떨어졌다가 다시 붙었다가 하는 매일의 경험을 통해 엄마라는 안전기지를 충분히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아이는 늦은 시간까지 엄마를 잘 기다려주었던 것 같다. 언젠가 엄마가 매일 늦게 데리러 가면 엄마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아이가 친구들이 4시 즈음 대부분 하원을 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기 혼자 유치원 선생님을 독차지해서 괜찮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이유가 뭐든 저녁 퇴근길에 헐레벌떡 아이에게 달려가는 엄마에게 왜 이제왔 냐고 떼부릴 줄도 몰랐던 아이에게 아직까지도 참으로 고맙고도 미안하기도 하다.      


그 당시 퇴근길의 아이 하원 스트레스 때문에 꾸었던 꿈은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지하철이 고장이 나서 발을 동동 구른다거나(실제로도 1호선 지연은 많았지만) 버스를 탔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다른 곳에 내려서 헤맨다던가 아니면 아예 길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아이를 잃어버려 찾아 헤매는 꿈도 꾸었다. 그런 막막한 상황에서 남편 핸드폰 번호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든가 하는 꿈들도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  아직 나는 서러워해야 할지 아니면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경험은 아무것도 아니니 지금 아파해야 하는 것이 얼토당토 않는지를 가끔 헛갈리는 내 경험 속에 허우적 거리고 있다. 너 충분히 마음 아파해도 되라고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자잘한 나의 경험들은 이상하게도 자기발견 과제를 하면서 나를 울게 만든다.




참고문헌

1. 대상관계 이론 입문, Lavinia Gomez 저, 김창대 외 역, 학지사
2.대상관계 치료, Sheldon Cashdan 저, 이영희 외 역. 학지사

3. 부모심리 수업, 권경인 저



Picture by Lazypig

매거진의 이전글 위니콧에게 배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