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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코밀 Nov 11. 2024

위니콧에게 배우다

상담대학원 적응기


아무리 힘든 과거를 거쳐온 지금이지만, 누군가는 여러분을 안아줬기에(홀로 존재하는 아기는 없기에)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내게 깊은 울림을 주는 수업시간이었다. 아기는 누구든 안아주지 않으면 죽는다는(살아남는다 하더라고 정상이 아닌) 이 사소한 사실은 인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누군가 안아준다는 것은 엄청난 불안과 공포와 파괴될 것 같은 경험 속에서도 견뎌지는구나, 파괴되지 않는구나를 느끼게 되는 경험이기에 우리 모두에게 아주 소중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험이다.   

 



이번에는 위니콧에 대한 내용입니다. 


Winnicott의 참자기와 거짓자기, 정신병의 개념


위니컷에 의하면 생애 초기 유아는 어머니에게 절대적 의존하고 있으며 어머니가 유아의 욕구에 잘 맞춰져야 유아가 자신의 잠재력을 통합하고 존재의 연속성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는 아기의 성장을 돕기 위해 제공되는 어머니의 헌신을 일차적인 모성적 몰두라고 하였다. 타고난 잠재력이 존재의 연속성을 경험하게 될 때 비로소 최초의 자기로 형성되며, 이때 타고난 잠재력이 자신만의 심리적 실재(psychic reality)와 신체적 체계(body scheme)를 획득하며 최초의 자기가 되는 바, 위니컷은 이러한 최초의 자기를 중심적 자기 혹은 참 자기라고 불렀다.     


반면에 거짓자기는 대상관계 초기에 충분히 좋은 양육이 부족하여 아기의 자기애적 전능감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할 때 아기가 외부 대상에 대해 정신에너지의 집적(cathexis)을 잘 이루지 못하고, 반동적으로만 반응하며 자발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는, 참자기가 은폐된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위니컷의 관점을 통해서도 인간발달에 있어 무엇보다도 양육자의 돌봄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정신병 : 정신병이란 환경적 결핍증이라고 하였다. ‘절대적 의존성이라고 불리는 생애초기 자기형성기에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정신병을 얻는다. 아이가 제대로 발달하고 성숙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의 부재, 즉 결핍은 생에 초기관계의 실패에서 나오며 이는 정신병을 가져온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시기에 유아는 자기와 환경이 분리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해서 이때 경험하는 상처는 자신이 반응할 수 있는 외적인 결핍이라기보다는 유아 자신의 주관적인 세계를 흔드는 외상 혹은 분리이고 이를 결핍(privation)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정신병은 엄마와의 초기관계의 실패에서 나온다. 취약한 아이는 더더욱 이 실패를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엄마와의 관계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안아주기, 다루어주기, 대상 제시


안아주기 : 위니컷의 주요한 개념으로서 ‘안아주기’는 신체적으로 안아주기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이는 유아에게 필요한 전체적인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안아주기는 신체적인 것과 정서적이 것 모두 포함) 이때 유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대상으로서의 어머니’와 ‘환경으로서의 어머니’의 역할이 적절히 수행될 때 안아주기(holding)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다루어 주기 : 초기 미분화 관계에서 이상적인 다루어주기란, 유아는 엄마의 민감한 손길과 신체에 대한 배려를 통해 통합된 방식으로 신체적, 정서적 만족을 경험할 수 있다. 이로서 아이는 감각과 정서를 연결하고 마음과 신체의 안정적인 통합을 가지게 해 준다.       


엄마의 신체에 생에 초기 민감한 다루어 주기를 경험하면 자신의 정신적, 정서적, 신체적 능력이 ‘참 자기’안의 삶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개인적인 것이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신체가 비인간적으로 다루어지거나 자신의 능력보다 오래 견디어야 한다면 아이는 비현실감과 모호함으로 방향을 상실하게 된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무엇이 안과 밖인지, 기쁨이고 절망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안아주기(손길)은 내가 경험된다. 온몸이 경험되며 경계가 확인되는 경험이고 이것은 self가 경험되는 자극이다. 다루어주기는 그보다는 훨씬 더 미세한 신체적 손길(만짐)이자 배려이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기 수유를 할 때 아기가 모유를 잘 먹을 수 있도록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엄청나게 세심한 신체적인 핸들링이 필요하다. 엄마의 민감한 손길과 신체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통해 1) 통합된 방식으로 신체적, 정서적 만족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2) 감각과 정서의 세계를 연결할 수 있고, 3) 마음과 신체의 안정적인 통합을 가지게 해준다. 생애초기 민감한 다루어주기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정신적, 정서적, 신체적 능력이 참자기 안에서 연결되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체가 비인간적으로 다루어지거나(다루어주기가 안되면) 정서적, 신체적으로 홀로 오래 있어야 한다면  유아는 자신의 신체적 욕구를 경멸하게 되고 신체적인 경험에서 멀리 떨어져서 자신의 몸보다는 마음과 동일시 함으로써 이를 다루려고 한다. 유아는 참자기가 신체적이기 보다는 실체가 없는 영적인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아이는 후에 비현실감. 비인격화, 신체적 자기에 고정되지 않고 마치 진공 속에 부유하는 것과 같이 느낄 수 있다. 비현실감과 모호성은 신체를 포함은 세상과 특별한 연계성을 느끼지 못하는 방향상실과 연관이 있다.


대상 제시 : 대상 제시는 엄마가 아이에게 외부세계를 유아에게 가져다 주는 방식이다.(먹는 것이나 장난감) 민감한 엄마는 아이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미리 대상을 제시하지 않고 또한 아이가 원할 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는 엄마이다. 적절한 대상 제시는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노력으로 변화와 만족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마술적 통제감을 느끼게 된다. 유아의 상태에 맞춘 방식으로 대상과 경험을 제시함으로써 어머니는 초기에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전지전능함에 대한 확신과 현실에 대한 각성에 필수적으로 선행하는 이중적 통일체를 가지도록 도와준다. 유아는 일치감과 세상에 대한 신념을 개발하고 타인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유아는 먼저 다가가 관계를 맺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세계가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유아의 욕구에 시기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대상제시를 하게 되면 유아는 자신이 이해받고 공감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보다 타인의 기대에 맞추는 ‘거짓 자기’의 관점으로 살아가게 된다. (적절한 대상제시는 아이에게 독립성과 자율성을 주며 참 자기를 발달시키고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적극적으로 탐험하는 자신감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한다)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의 특성

 

‘충분히 좋은 엄마’는 아이의 심리 성장과 발달에 있어서 유아의 전능감에 적절하게 반응해주며 그것을 의미있게 도와주는 양육자를 의미한다. 아이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전능감을 경험하면서 참자기가 발달하게 된다. 유아는 자신의 자발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경험을 통해서 창조와 통제의 환상을 즐기고 점차 놀이를 즐기고 상상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안아주는 환경으로서 충분히 좋은 엄마란 먼저 1) 유아의 자발적 욕구에 대해 거울 반응을 해주고 또한 혼자 있을 때는 자아 관계성을 느끼게 해주는 엄마, 2) 유아의 중간대상을 존중해 주는 엄마. 마지막으로 3) 유아의 공격성을 보복하지 않고 견뎌냄으로서(살아남음으로서) 받아주는 엄마를 말하는 것이다.



위니콧을 통한 나의 이야기


아이가 이제 고등학생인데도 나는 가끔 아이에게 대상제시에 자주 실패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다지 어리지 않았을 때(아마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돈가스를 시킨 아이의 돈가스를 아이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잘라주려고 했을 때 아이는 소리쳤다. ‘엄마, 나도 할 수 있어~.’ 아, 그때의 머쓱한 경험이란. 아이가 서서히 독립적인 행동을 하고 자율적인 사고를 하는데도 가끔 엄마라는 존재는 그것을 잊어버린다.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이다. 주말에도 학원에 가는 아이를 위해 나는 주로 학원 라이딩을 해주는 편이다. 내년이면 고3이고 평일 학교 수업도 매일 10시에 끝나고 오는데 주말 내내 학원에 가느라고 체력이 힘에 부쳐서 아침마다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가 늘 걱정이 되었다. 학원을 끝나고 바로 스터디 카페에 가서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내가 아이에게 그랬다. 학원 끝나고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엄마가 스터디 카페에 데려다주겠다고 하자 아이는 갑자기 ‘엄마, 혼자 갈 수 있어! 집에 들르면 시간 걸려서 안 돼’라고 말하며 짜증을 내었다. 일요일이고 내가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그저 물어본 것 뿐인데 아이에게는 과한 참견이나 통제를 받는 것처럼 느껴졌나 보다. 평상시에도 나는 과도하게 아이의 식사에 집착하는 편이라 집에 들러서 밥을 먹고 가라고 했던 부분 때문인지 아니면 작은 것도 도와주려는 엄마의 마음이 과하게 다가와서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 가뜩이나 시간이 부족한 아이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      


상담을 공부한 이래로 나는 아이의 공격성에 바로바로 반응하지 않을 만큼의 마음 탄탄한 엄마가 되었기에 ‘아, 그래, 그럼. 알겠어. 엄마도 시간이 돼서 물어보는거지. 혹시 필요하면 네가 그때 얘기해.’하고 대화를 마무리하였지만, 평소 아이에게 과하게 대상제시를 하고 있질 않나 하고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걱정하는 마음을 적절한 강도와 횟수로 표현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내가 보기에도 아이가 충분히 감당할 만한 좌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걱정되어 미리 그 싹을 잘라버리고 싶은 나의 마음을 나 자신에게도 들킨 것 같아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엄마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내가 할 수 있다’라고 말해줘서 나는 내심 그것이 참 다행이었다. 눈치만 보다가 부모가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거나 그러다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못 하고 마음만 아픈 아이가 되는 것은 정말 원치 않는 일이다.     


아이는 저녁에 카카오톡 메시지로 아까 짜증을 내서 미안했다고, 자기도 할 수 있는데 엄마가 도와주는 게 힘들까봐 미안한 마음에 말이 잘못 나왔다고 사과를 해 주었다. 아이의 공격성을 견디고 버티면서 기다린 보람은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며 솔직하게 엄마에게 마음을 전하면서 사과도 할 줄 아는 아이로, 이전보다 심지 깊은 아이로 되돌아오는 것 같다. 과한 대상제시, 이젠 제시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그게 어려울 때는 차라리 어떤 것이 나은지 아이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보는 쪽으로 해야겠다. 아이는 때로 엄마보다 현명하고 나름대로 계획이 있다는 것을 늘 염두하고 선택권을 주는 것이 나으리라. 아이가 혼자서 하는 경험은(홀로 있음)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것을 잊지말아햐 한다. 아이는 부모가 인지하기도 전에 이미 중심적인 자기가 침범당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부모와 타인과 소통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1. 대상관계 이론 입문, Lavinia Gomez 저, 김창대 외 역, 학지사
2.대상관계 치료, Sheldon Cashdan 저, 이영희 외 역. 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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