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난 글쓰기에 대한 목마름이 있긴 했어도 경험도 부족한데 읽은 책도 별도 없어서 그래서 결국은 글감이 없어서 쓰기 힘들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활의 작은 조각들 전부가 글로 써질 수가 있다는 생각을 요즘은 하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내 하루는 특별한 일은 아니라도 실제로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고 다만 그것들을 글로 옮기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서서히 느끼고 있다. 내게 의미가 있건 없건 어떤 일이든 곱씹는 나의 성격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이제야 알겠다.
나도 몰랐는 데 내 컴퓨터 깊숙한 장롱 속 파일에는 나의 많은 묵은 글들이 있었고 꽤 오랫동안 뭔가를 써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음을 들키기 싫은 사람들은 여러 개의 문을 통과해야 그 사람 마음을 알 수 있듯이 내 파일 속 글들 역시 여러 개의 폴더를 거쳐야만 속내를 드러낼 수 있다.
쓰는 사람들은 왜 쓰는 것일까. 쓰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들이라서 그렇다. 속에서 화수분처럼 나오는 말들을 가슴속에만 담아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말들이 차고 넘쳐서 더 이상은 좁은 가슴에 머무르지 못하고 글로 나오는 것이다. 쓰는 사람들은 글로 말하는 것이 더 편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기록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과의 대면일 때가 많다. 나의 감정들을 쓰는 일은 때로 나 스스로도 감당하기 두려운 일일 때도 있다. 잊기 위해 쓰지만 결국 잊지 못하고, 그래서 쓰면서 한없이 괴로워하고 놀라고 그리고 희망을 얻고 그리곤 또 쓴다. 아마 쓰는 사람들은 한 번쯤은 다 느껴봤을 것이다.
요즘 나의 글쓰기는 지나가는 것에 대한 붙들음이다. 내가 뱉어낸 이야기들은 기억하고 싶은 추억일 때도 있고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은 분노일 때도 있다. 순간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영영 먼지처럼 사라질 무언가가 두렵기 때문에 쓴다. 무엇이 그리 두렵고 불안한 것일까. 사춘기 여학생도 아닌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내 손가락 사이를 물이 빠져나가듯이 속절없이 빠져나갈까 봐 두렵다.
나의 예전 글 속에는 유치원 꼬마였던 딸아이가 살아 있다. 물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누비는 금붕어처럼 눈 밭을 헤집고 다니던 어린 꼬마는 눈을 뭉쳐서 그대로 엘리베이터로 가지고 온다. 이쯤 되면 식상한 엄마의 반응,
"그걸로 뭐하게? 설마 방으로 가져 가게?" 딸아이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응, 냉동실에 넣어 둘 거야."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옆 집 아줌마가 좀 크게 웃어서 나도 덩달아 웃었다. 그리고 얼마 후엔 밖에서 얼었던 얼음들을 깨서 들고 왔다. 녹으면 따로 통에 받아둔다. 알면서도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아주 특별한 물건이라는 듯이 이야기한다.
"이건 얼음이~~ 녹은 물이야~~."(그걸 누가 모르냐고~)
흔한 눈과 얼음이 어린아이에게 행복한 일상의 재료가 되었던 그 시절들이 살아난다. 그 시절에 행복했던 나도 살아있다. 하루 종일 놀이공원을 끌고 다녔건만 그 날 저녁밥상의 김자반을 먹고 감탄하던 아이. 결국 놀이공원 대신 김자반이 그림일기 속으로 들어갔던 그 순간이 살아있다. 늘 위트와 유머가 넘치시던 건강하셨던 아빠도 여전히 내 글 속 어딘가에는 살아계시고 수년째 하루 종일 병원신세로 엄마와 우리 오 남매의 가슴 한편 아리게 하시는 아빠도 존재하신다. 내겐 기록이란 이런 것들이다.
그래서 써야겠다. 행복한 일이건 기분 나쁘고 상심이 되는 일이건 모든 순간들이 모여 나의 하루가 되고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도 매일이 나의 일상이니 더 시간이 지나 아무것도 기억나기 않을 때를 위해 좀 더 기록하리라 생각해본다.
결국 무엇을 쓰던 쓰느냐 쓰지 않느냐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