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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코밀 Feb 27. 2021

게임에서 나오세요.

화해에 대한 이야기

적어도 자매끼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저는 그동안의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했는지 동생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사회생활 속에서 우리는 늘 발톱을 숨긴 맹수처럼 지내다가 가족처럼 만만한 상대에게 어느 순간 그 발톱이 어흥하며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자꾸만 귀찮게 하면 얌전하던 우리 고양이가 갑자기 발톱을 확 드러내고 제 손등에 생채기를 내던 순간처럼요. 분노의 감정은 금방 화를 내고 불꽃처럼 사그러 들겠지만 화해는 늘 그렇듯이 쉽지는 않죠.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는 같은 일로 여러 번 용서를 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다시는 안 보겠다 생각하고 불같이 를 내고 인연을 끊은 사람들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짧지 않은 인생인데 만나는 인연이 어쩌면 다 소중할 텐데 결국 너와 나는 아니야란 감정이 들면 우리는 더 이상 예전과 같아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나를 용서하고 싶다면 화를 냈던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알던 과거의 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그런 나 자신이 지질하게 생각되기 그지없다면 우린 화해를 청하지는 않겠죠.


사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생각이 각기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걸 오늘도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사는 것은 참 어렵네요. 나도 나를 모르는데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그러니 나의 말을 듣고 화를 내는 것은 전부 니 탓이야.'라고 한 때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지요. '네가 그럴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화가 났었어.'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누구나 사람은 자기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화라는 감정은 순전히 나의 상황에서 오는, 가끔은 왜곡되고 편견에 사로잡히고 때로는 아집으로 뭉친 감정의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성의 없고 생각 없고 배려 없이 내뱉는 상대의 말 때문이라면 상황이 달라지겠지요. 저는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아무리가 그럴 의도가 없었더라도 상대방이 화가 났다면 일단은 사과하는 것이 맞다고요. 왜냐하면 상대방도 저처럼 해주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화가 났다면 상대방도 우선은 제 감정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었겠다. 미안해.' 우리는 이 말 한마디를 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듯이 누군가에게 화가 난다는 것은 화가 난 당사자의 일만은 아닐 거예요. 서로에게 얼마 정도의 원인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 때문에 화가 난 사람이 있다면 왜 그럴지 한번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요. 아직 우리 관계가 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면요. 서로의 관계가 소중하고 아직 우린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도 사랑하는 사이로 남고 싶어 한다면  용서를 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엔 정말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에릭 번은 심리게임이라는 이론에서  희생자, 박해자, 구원자의 개념을 말했는데, '심리게임'이란 겉으론 그럴싸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이 있는 인간의 교류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누구든 심리게임을 시작하게 된다면 희생자, 박해자, 구원자 중의 한 가지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해요.*  결국 심리게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상대방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과 관심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고 내가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게임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본능적으로 게임 속에서 이기려고 하나 봅니다.


- 내 잘못도 아닌데 자꾸 미안하다고 말하게 되는 경우

- 잘해줘도 욕을 먹는 경우

- 언제 어디서나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 찬 경우

     (나는 나를 몰랐기 때문이다 중에서)


이런 유형의 인간은 흔히 말하는 드라마에서 자주 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주변에서 금방 찾아볼 수 있습니다. 행여 나는 한 때 그런 모습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딱히 그 사람 잘못도 아닌데 자꾸만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해하는 사람이 있나요? 이런 희생자들이 갖는 대부분의 마음은 당신이 옳고 나는 틀렸다는 마음이라고 해요. 상대방의 비난과 질타가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잘 못해서 그런 거야 하고 수긍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의 비난과 질타는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잘해줘도 늘 욕을 먹는 박해자와 말하지 않아도 이것저것 다 챙겨주는 데도 늘 돌아오는 대접이 시원찮은 구원자는 '나는 옭고 당신은 틀렸다'라는 관점을 주로 가집니다. 서로의 관점이 다르면 우리는 상대가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심리게임 안에 또 다른 심리게임이 있다는 거죠. 박해자의 모습을 하고 희생자 인척 한다거나, 구원자 역할을 하다가 상황이 나빠지고 본인에게 불리해지면 희생자나 박해자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요. 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이런 유형의 사례들을 얼마든지 주변에서도 찾을 수가 있지요. 어떻게 하면 심리게임을 그만둘 수 있을지  그 방법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행여 그 게임을 만든 장본인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내가 심리 게임 유발자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관계에 대한 상처가 계속된다면 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경험을(주로 관계에서 오는 상처나 나쁜 감정들) 자주 반복하고 있지 않은지, 이 심리게임으로 얻어지는 이득이 무엇인지,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을 실제보다 과장해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어쩌면 서로 관점이 다른, 우리 자매들도 심리게임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게임 속에서 서로 이기고 싶어서 아등바등하였지요. 심리게임에서 이기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은 어쩌면 말도 안 되는 떼를 부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마음 좀 알라 달라고 말이죠. 우리가 어린아이라면 부모님께 가끔은 응석이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몸은 성인인 우리에게 몇 번의 아픈 경험이 반복되어 이상 기운을 감지했다면 스스로에게도 생각하는 시간을 주어야겠지요. 적어도 나의 마음을 진짜, 진짜 아는 사람은 저뿐일 테니까요. 다만 우리는 자신의 본심을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을 뿐일 겁니다. 아니면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고 싶지 않거나 과거의 상대방에게 여전히 서운한 감정이 남아있어서일 거예요.


동생에게 불같이 화를 냈던 저는 얼음처럼 꽁꽁 언 동생의 마음을 녹이려고 여러 번 용서를 구했습니다. 때론 한 번의 사과로 안 되는 일이 많습니다. 서로에게 조금씩은 다 잘못이 있었을 거예요. 누구 하나 전적으로 잘못하진 않았을 거예요. 누구 하나에게 전적으로 다 잘못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린 화해라는 걸 할 수 있을 거예요.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치 있는 일일 겁니다. 왜냐하면 상대방과의 화해는 결국 과거에 모든 것에 서툰 나를 용서해주고 자신과의 화해를 통해 결국 나를 위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사랑한다면, 미래에도 우린 사랑할 사이라면 마음을 열어서 게임에서 나와 봅시다. 좀 지면 어떤가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일 수도 있어요. 내가 먼저 용서를 구해도 상대방이 결국 나도 미안했어라고 말한다면 결국 둘 다 이기는 것일 테니까요. 오늘 미움 한 스푼 더 덜어지는 그런 인생 어떤가요.



* 김정현, <나는 나를 몰랐기 때문이다>, <2020, 유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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