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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콩 Aug 02. 2019

[항해사의 아내 일기] 방선은 무엇으로 버티나?

2019년 7월 방선 6일 차에 쓴 일기.


 우연찮게도 짐가방에 딸려 들어온 믹스커피 하나가 나를 다시 노트북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믹스커피의 카페인과 당이 한꺼번에 필요한 절체절명의 순간을 위해 가방에 넣고 다니던 몇 개의 믹스커피 중 딱 하나만이 이번 방선 짐에 딸려 들어왔다.  지난 며칠간 유령처럼 남편의 당직 일정에 맞추어 잠들었다 일어나서 인도네시아 주방장이 해주는 밥을 얻어먹거나 하면서 빈둥거린 참이었다.     


마지막 믹스커피.

정성스럽게 물을 끓여서 알맹이 카누 커피를 조금 더 얹었다. 물을 살짝 더 붓고 플라스틱 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커피가 너무 많아서도 물이 너무 많아서도 안 된다. 이것은 마지막 믹스 커피다.


 커피를 마시면서 노트북을 열고 워드 창을 켠다. 뭔가라도 써야 하는데 공허하게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헤맨다. 앤 라모트의 말처럼 글을 쓰기 위해 앉으면 나타나는 현상. 처음에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덩치 큰 자폐아처럼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게 된다. (다시 읽어보니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인 표현이다.)

 아웃풋을 미리 생각하지 않았던 지난 며칠간을 반성해본다. 그래도 오늘의 믹스커피는 십 점 만점에 십 점.

남편이 커피를 좋아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실 항해사는 선장이 되기 전까지는 커피 마시는 일이 쉽지 않다. 하루 4시간씩 낮과 밤에 이어지는 교대근무 때문이다. 남편은 항해 도중에는 커피를 아예 끊는다.



 배 안에서는 좀 자주 씻게 되는 것 같다. 씻는 일 말고는 상쾌하게 기분을 전환할 만한 일이 별로 없다. 특히나 연안 앵커리지에서의 일상은 무료하기 짝이 없다. 아침 6시. 당직서는 남편이 있는 브릿지로 올라갔다. 안개 때문에 접안이 취소되었다는 말을 듣자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오늘이야말로 당진 발전소에 접안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치 눈앞도 볼 수 없는 해무 앞에서는 30년 경력의 캡틴도 혀를 내 누르게 했다.


레이더가 돌아가는 첨단과학기술이 태풍도 아니고,  안개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앵커리지로 돌아간단다. 아니나 다를까 구름 위에 배가 뜬 듯 사방이 안개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광경을 원피스던가 어딘가의 만화에서 본 것도 같다. 수평선은커녕 폭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레이더가 있는데 왜 안 되느냐 물어보니 도선은 육안으로 하는 것이라는 남편의 대답이 돌아왔다.

 

 여담이지만 보령 발전소는 가끔 이렇게 웨이팅이 3주 정도 걸리기도 한다고 한다. 앵커리지에서  일간의 대기도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데 3주 웨이팅이라니.


 나는 항해사가 적성에 안 맞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교육받고 배를 타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의 박용체(선박에 맞는 체질?)라는 말을 듣는 나이지만 이번 방선에서 확실히 알았다. 나는 항해사가 적성에 안 맞다. 새삼스럽게 남편이 대단하다.     


 배 안에서 시간과 정신의 방(?)에 갇혀 있다 보면 오만 잡생각이 다 들기 마련이다. 더더욱 육지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마무리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면 더욱더 그렇다.

 

 남편이 배를 탄지는 꼬박 십 년 정도 된다. 해양대학교를 졸업한 뒤로 일 년 정도의 일탈을 빼고 계속 상선을 탔다고 한다. 신랑을 알게 된 것은 신랑이 3등 항해사였을 때였다. 오며 가며 안면만 있던 남편과 사귀기 시작한 것은 1 항사 무렵이다.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정말 인연이었다면 너무 돌아서 만난 인연이다.


 배를 타다 보면 배를 내리기 위해서 배를 타는 분들도 많이 만난다. 어떤 일을 꾸준히 하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고 할 정도로 꾸준하질 못한 내가 만약 항해사였다면, 나는 진작 다른 직업을 찾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남편은 이 길고 긴 시간 동안 어떤 생각을 하며 일 해왔을까. 가끔은 무섭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했을 것이다.     


 요즘은 부쩍 남편의 고민이나 힘들어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말은 많으면서도 워낙에 속에 있는 말을 안 하는 스타일이다. 꼬여버린 승선 일정 때문에, 혹은 진급 문제 때문에, 가끔은 쓸데없이 예민하기만 한 아내 때문에 속을 끓이는 남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계속 배를 타는 사람들이나 배를 그만 타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용기와 희망을 가지면 좋겠다.


당신들은 모두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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