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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콩 Feb 21. 2023

[육아에세이] 손톱

아이의 자라나는 손톱을 자를 수 있다는 축복


“아얏-"

반팔티를 입은 어깨에 매달리는 아이 손이 매서웠다. 주말에 늦은 아침밥을 먹고 난 아이는 신이 나서 장난을 치는 중이었다. 아이 손을 들여다보니 손톱이 부쩍 자란 것이 보였다. ‘아이 손톱을 다듬어준 게 언제였더라’ 가늠해 보지만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부랴부랴 손톱깎이를 찾아왔더니 아이가 도망친다. 손톱깎이를 들고 아이와 술래잡기를 한참 하고 나서야 간신히 아이의 손을 붙들 수 있다.


 아이의 손톱이 너무 작아 한 번에 깎기도 조심스러워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잠깐이라도 망설이면 아이의 손은 미꾸라지처럼 달아나버린다. 이번에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다. 다시 술래잡기를 하며 아이를 달래고 얼러보지만 열 개의 손톱과 열 개의 발톱을 모두 깎는 데는 며칠이 걸린다. 이번에도 몇 개의 손톱은 미처 깎지를 못했다.


 아이를 낳은 이후로 내 손톱 관리하기도 힘든데 아이의 손톱까지 관리해야 한다. 관리하는 것도 버거운데 아이는 쉬이 협조하지 않는다. 손톱을 깎으며 이리저리 튄 손톱을 주워 담다가 화가 났다. 아이는 걷고 뛰지 못할 때부터 손톱 자르는 것을 싫어했다. 손톱깎이만 들고 있으면 고사리 같은 손을 꽉 쥐고 펴지 않았다. 노래를 부르며 달래 보기도 했지만 더러 버럭버럭 화도 내고는 했다. 손톱은 초보엄마에게는 귀찮고 번거롭기만 한 일이다. 적어도 오늘 아침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주에 지구 반대쪽에 있는 나라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대규모의 지진이 발생해 몇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신문지상에서는 무참하게 부서진 건물과 거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신문을 보다 사진 하나가 내 눈길을 잡았다. 한 남자가 건물의 잔해 앞에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작업복을 입고 있는 것만 보면 구조대원이 잠깐 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사내는 부서진 건물의 잔해에 깔린 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제야 금방이라도 없어질 것 같은 손이 보였다. 남자는 구조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혼자서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인력으로는 도무지 혼자서 건물의 잔해를 들어 올릴 길이 없지만 숨진 딸의 손을 놓지 못하는 사연이었다.


 사진 속 아이의 손은 먼지가 잔뜩 내려앉아 회색으로 보였다. 설명이 없었더라면 사람의 손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득 그 아이의 손톱은 다시는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속 남자는 다시는 아이의 손에서 온기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망연자실하게 앉아서 잡고 있는 아이의 손이 얼마나 차가울지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거실에서 오늘도 혈기 왕성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손톱을 자르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말을 안 듣는다고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이렇게 손톱이 길고 더러우면 안 된다고 다그친 적도 있었다. 이렇게 작은 손에서 손톱은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느냐고 한숨 쉰 적도 있었다.


 손톱이 길어 나는 것이야말로 아이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깎아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깎아서 이어 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미처 못 깎은 손톱을 깎기 위해 저녁나절에 다시 아이 손을 잡고 앉았다. 아이의 작고 통통한 손을 가만히 얼굴에 대어 보았다. 보드랍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손톱을 깎을 수 있다는 것은 사소하지만 얼마나 감사한 일상인가.


 지구 반대편에서는 국가적 재난이 일어나고 있는데, 나는 고작 내 아이의 손톱에 좀 더 너그러워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튀르키예에서는 손톱을 깎는 일상은커녕 손톱깎이를 구호품으로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다. 부디 지구 반대편에 ‘손톱을 깎는 일’이 사소한 일상이 되는 날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기도해본다.       


https://naver.me/Fgvmbf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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