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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콩 Oct 11. 2023

모두 손 들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손 들어




“손 들어 보세요.”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손 들어보세요.”

 당시 담임선생님은 작은 체구로 절대로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는 분이셨다. 항상 조곤조곤 말씀하셨고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걸었다. 외모나 언변이 화려하지 않았지만, 망아지처럼 날뛰던 학생들을 잠재우는 조용한 카리스마가 있으셨다. 가정 과목을 가르치셨는데 나에게는 어려운 선생님이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 당시 내 인생은 사춘기의 혼란으로 가득했다. 손을 든 학생들의 수를 세는 선생님에게 의아한 것도 잠시, 생각보다 행복한 친구들이 많았다는 것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며칠 후 선생님은 우리들을 데리고 버스로 20분 걸리는 근처 도시로 갔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함박스테이크나 돈까스를 먹었던 것 같다.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외식이 처음이었던 시골 소녀에게는 신기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던 식사였다.  


 식사 후에는 고민상담 시간이 있었다. 그날 내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 고민이 있다 하더라도 친구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말을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처음 선생님의 질문을 들었을 때, 혼란스러운 사춘기에 대한 무슨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고작 고민상담이라니 시시하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친구들과 도시로 나가서 외식을 했던 것은 어린 마음에 큰 이벤트였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성인이 되어서도 간혹 선생님과 연락을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중학교 동창의 결혼식에서였다. 거의 10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인 선생님의 얼굴을 보자 반가움보다는 어색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근황을 묻는 물음에 여전히 공부 중이라고 얼버무렸다. 예식이 끝나고 피로연 자리에서 우연히 선생님의 곁에 앉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경조사가 있거든 언제든 연락 주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 다 하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아이를 낳는 동안, 결국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아이가 돌이 지난 즈음, 문득 중학교 3학년 때의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 날도 아픈 아이를 돌보다 간신히 짬을 내어 설거지를 하던 참이었다. 설거지는 해도 해도 끝나지 않았고, 뒤로는 밀린 집안일이 아래에는 아이가 떼를 쓰며 매달려 있었다. 그릇에 묻은 퐁퐁 거품을 헹구는데 문득 중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손 들어보세요.’  


 선생님은 왜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 그 날 식사 후에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의 집으로 몰려가, 선생님의 처녀시절 사진도 보고 결혼 전에 연애 하던 이야기도 들었다.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그 많은 학생들에게 외식을 시켜주고 고민상담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 중에서 딱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선생님 역시 우리처럼 혼란스럽고 고민이 많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셨던 것이다.


 처음 선생님의 질문이 떠오른 그날부터였다. 이후로 이따금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생각하다보니 궁금증은 꼬리를 물었다. ‘어째서 설거지를 하다가 그 질문이 떠올랐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은 한참 후였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손을 들어라‘는 질문이 처음 떠올랐던 그 날. 어쩌면 나는 힘든 하루를 지나고 있었던 것 같다. 누가 같은 질문을 하면 두 손을 번쩍 들고 싶었을 만큼 말이다.


 남편은 항해사라 일 년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낸다. 혼자 견뎌야 했던 입덧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시어머님 아프셨다. 혈액암의 일종인 뇌림프종 이었다. 태교는커녕 배가 불러서까지 동동거리며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암 병동을 드나들었다. 임신 직후 떠난 남편은 산달이 되어서야 곁에 왔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를 막 낳았을 때 친정아버지는 대학병원의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다.


 아이의 탄생에 대한 떠들썩한 축하 대신 가족들은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중환자실의 아버지를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는 의사의 말 때문인지, 갓 태어난 아기 얼굴을 봐도 눈물만 나왔다. 아이가 태어난 지 2주 만에 남편은 또 회사일로 떠나야했다. 일 년에 두어 달 정도만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만난 남편이었다. 하지만 이 때만큼 남편의 직업이 야속한 적은 없었다. 다행히 친정아버지는 위기를 넘기시고 일반 병동으로 나오셨다.


 혼자 아이를 돌보는 상황도 벅찼지만 병원에 계시는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을 들여다보는 일상은 계속되었다. 여력이 되는 대로 죽을 끓여가며 마음을 보탰지만, 어머님의 용태는 계속 나빠지셨다. 남은 생이 2주 남아야 들어갈 수 있다는 호스피스 병동에서도, 어머님은 쉬이 떠나지 못하셨다. 하나뿐인 아들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결국, 아들 대신 내가 상주가 되어 어머님을 먼 곳으로 보내드린 것이 작년 봄의 일이다.  


 아이는 자주 열병이 났다. 일단 아프면 며칠 입원을 해야만 열이 떨어졌다. 코로나로 방역이 한창이던 시기라, 열이 펄펄 끓는 아이의 입원이 어려웠던 적이 있었다. 사람이 가득한 병원 대기실 바닥에서 주저 않아 대성통곡을 했었다. 언젠가는 아픈 아이를 차에 싣고 병원에 가면서 사고가 날 뻔한 적도 있었다. 매번 남편은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 사랑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간혹 중학교 친구들과 연락할 기회가 오면 선생님에 대해 꼭 물어본다. 하지만 제대로 기억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다. 같은 학교를 나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다른 친구들도 있다. 선생님에 대한 내 기억이 맞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어쩌면 선생님 그 질문에는 별다른 뜻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부디 너희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선생님의 바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돌이켜보면 열여섯 소녀 때 세상이 무너지도록 고민하던 것이 지금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때가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지금 힘든 것들도 당장 어쩌지는 못해도 언젠간 강물처럼 흘러갈 것이다. 아이도 잔병치레가 잦지만 어른들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 더 건강해 질 것이다. 함께 있지 못해 더 애틋한 남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온다.


 오늘도 어김없이 남편의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올해는 함께 연말을 보낼 수 있다는 남편의 목소리 너머로 다시 어린시절 선생님이 말씀이 들린다.

"그래도 행복한 사람 모두 손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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