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무봉 옛글

바퀴

조성범

by 조성범

바퀴


동네 언덕을 한 바퀴 돌고 왔다.
널따란 길도 건너고 좁은 언덕도 오르고
흙길, 언덕길, 콘크리트 길, 돌계단, 나무계단을 올라
동산에서 숨도 한번 크게 내쉬었다.

봄 나뭇가지의 무표정한 모습과 생기 없는 행인의 얼굴이
어쩌면 닮을 꼴인지 재밌기도 하고 아련하다.
생명은 계절을 벗어나기 어려운가 보다.

시절이 시무룩하면 궁상을 떨고
기고만장하면 모든 것이 내 세상 같아 우쭐대기 일쑤다.
봄볕이 시리멍덩하니 움직임을 일으키는 생명이나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돌바위나 돌팍이나
우수에 젖은 표정이 한결같다.

얼른 파릇파릇한 싹이 돋아나야
싱그러운 꽃비에 홀리며 노니는 활기찬 군상을 보려나.
좋을 때가 있으면 어려울 때가 있으련만
잠을 자고 일어나도 어제요, 오늘도 어제이니
시절이 수상쩍고 쫓기는 듯, 할 일 없이
이리저리 발길 닿는 데로 돌아다닌다.

뭔가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면 좋으련만
어디 그게 맘먹은 대로 일순간에 도끼질하듯이
되는 것도 아니니,
맘이 천 길 만 길 바람 앞에 도리질하며
낭떠러지로 자빠지기 일쑤다.

달달한 봄날은 눈을 감았다.

엄니가 친척 결혼식 때문에 서울 올라오셨다가
갑자기 전화하셨는데 목소리에 걱정이 태산이다.
아직 그러고 있는 겨.
왜 또, 뭔 말씀을 하려고.
득달같이 엄니의 말을 낚아채
빨리 전화 끊을 궁리 하다가 생각 난 말이
바쁜 디, 엄마 담에 전화해요.

이 놈아 바쁘긴 뭐가 바빠,
뒤통수 한데 제대로 얻어터지고
긴 전화 고문을 당하고 나서야 맘을 식히려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사 간 집도 보고 하룻저녁 주무시고 가시면 좋으련만
막무가내 그냥 가신단다.
아들 집에 와서
며느리가 해주는 따땃한 밥도 드실 만 한데
자존심 하나로 살아낸
팔순 꼬부랑 할머니는 매몰차게 내려가셨다.

며느리 보기가 그러셨겠지. 다 네 놈이 문제여,
예전에 하셨던 엄니 말씀이 뇌리를 친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날 선 맘도 칠흑으로 물들고 있다.


2013.3.23.
조성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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