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독일 유학 중에 우리나라에 수입하고 싶은 게 여러 가지 있었다. 우선 떠오르는 것을 꼽으라면 합리적인 선거제도, 소득 중심의 건강보험제도(영세민인 유학생들은 거의 무상인 제도), 무상교육제도, 세입자 위주의 주택 및 부동산 제도 등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제도는 선거제도였다. 선거제도가 나머지 모든 제도를 좌우하기 때문이었다. 선거제도의 합리화가 곧 올바른 정치인들을 키우고 사회의 모든 부조리를 합리화시키고 정상화시키기 때문이었다.
선거제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민들의 의사가 의회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독일을 포함한 스위스, 네덜란드 등의 게르만 모형과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모형은 시민의 의사가 거의 그대로 의회에 반영된다. 이런 나라들이 생산성과 창의성이 높고 복지사회를 실현했다. (우리나라 선거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시민들의 의사가 의회에 거의 반영되지 않거나 매우 심할 정도로 왜곡된다는 것이다.)
우선 이런 나라들의 특징은 소수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당을 아주 쉽게 만들어 활동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호소하여 시민의 지지를 이끌어낸다. 이런 정당들이 적게는 몇 개, 많게는 수십 개씩 된다. 심지어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정당들도 꽤 많다.
이번 여름휴가 중 베를린에서 아흐레를 머무는 동안, 거리마다 선거홍보물이 나붙었다. 알아보니 2016년 9월 18일(일) 치러지는 베를린 시의회를 구성하는 지역 선거였다. 5년마다 시의회를 다시 구성하니까 지난번 선거는 2011년에 있었다. 베를린 시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정당, 그러니까 시의원을 배출한 정당은 다섯 개다.
중도좌파 정당 SPD 46명, 중도우파 정당 CDU 39명, 환경중심 정당 Grüne 29명, 동독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 좌파 정당 Linke 19명, 민주주의, 인권, 인터넷 정보보호와 투명성을 중시하는 해적당 Piraten 15명, 무소속 1명 등 총 149명의 시의원이 활동하고 있다. 이 밖에 의원을 아직 배출하지 못한 정당이 12개나 더 있고, 지역에만 활동하는 정당도 4개나 된다.
이렇게 다양한 사상과 정책을 실현하려는 정당들이 있기 때문에 베를린 시민들의 소수의견이 시의회에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구조다. 이런 지역의회 선거방식도 연방(하원) 의원을 선출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대략 다음과 같다.
1. 각 정당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의원이 될 후보자 명부를 작성하여 제출한다. 이 명부에 1번으로 맨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가장 선두에서 선거를 지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거홍보물에 이 후보자의 얼굴을 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선거일에는 유권자가 두 개의 투표지를 교부받는다. 첫 번째 투표지에는 유권자들이 속한 소선거구에서 지지하는 의원에게 투표한다. 소선거구제에서 최다 득표로 당선된 후보자가 의원으로 선출된다. 베를린의 경우 12개의 선거구에 78개의 소선거구에서 지역별 의원 78명을 선출한다. 여기에다 52명을 비례대표로 추가해서 선출한다. 베를린 시의원의 총정원은 130명이다. 그러나 현재 149명의 시의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어찌 된 것인가? 이것은 바로 두 번째 투표지에 의한 지지하는 정당에 대한 투표율에 의해 배정된 의석수와 첫 번째 투표지에 의한 소선거구에서 당선된 의원수의 괴리 때문에 발생한다.
3. 유권자들은 두 번째 투표지에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한다. 정당의 득표율에 의해 각 정당의 의원수가 배정된다. 이 정당 지지율에 의한 각 정당별 의석수를 확보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각 정당별 의석수를 배정받게 되면 소선거구에서 당선된 의석수를 뺀 나머지 의석수를 비례대표로 채운다 (비례대표 의원수 = 정당에 배정된 의석수 - 소선거구에서 당선된 의원수). 누가 비례대표로서 의원이 되는지는 선거관리위원회에 사전에 제출된 정당명부의 순서에 따라 정해진다. 각 정당은 두 번째 투표지의 지지율만큼 의원수를 확보할 수 있다.
4. 후보자 개인이 소선거구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정당 지지율이 낮으면 그 정당에 배정되는 의석수가 적어지기 때문에 의회에서 목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당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의원수는 정당 지지율에 의해 배분되기 때문이다. 독일 친구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CDU의 걸출한 정치인 헬무트 콜(Helmut Kohl 1930~) 전 총리는 자신의 고향인 라인란트 팔즈 주 소선거구에서 패배했지만, 정당명부의 상위에 등재되어 있기 때문에 비례대표로 연방(하원) 의원이 되었다고 한다.
5. 만약 정당의 소선거구에서 당선된 의원수가 정당득표율에 의해 배정된 의원수보다 많은 경우에는 그 의원수를 그대로 인정해주며, 부족한 경우에는 정당명부에 등재된 순서대로 비례대표의원으로 선출된다. 그래서 의원 총정원보다 실제 의원수가 많을 수 있다. 베를린 의원수(149명)가 규정된 의석수(130석) 보다 많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6. 독일은 연방국가로서 각 주(Land)가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각 주마다 주법이 조금씩 달라서 획일적으로 선거제도를 말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는 베를린에서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연방차원에서의 선거는 의석수 배분을 지역별 소선거구제 50%, 비례대표 50%로 정해져 있다. 연방(하원) 의석수는 지역별 소선거구 299석, 비례대표 299석으로 598석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현재 연방(하원) 의원은 630명이다. 그 이유는 지역별 소선거구에서 첫 번째 투표지에 의한 당선자가 두 번째 투표지인 정당 지지율에 의한 배분 의석수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고, 복잡하게 썼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아무리 쉽게 쓰려고 해도 능력이 부친다. 이해를 못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독일 선거제도가 시민들의 의사가 최대한 정치에 반영되도록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 그렇게 복잡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선거제도는 기존의 거대 정당들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고, 비례대표 의석 비율이 터무니없이 적어 시민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선거철이 되었지만, 유세를 하는 사람도 없고, 선거운동원도 없다. 거리에 선거홍보물만 붙어있을 뿐이다. 이런 홍보물이 없다면, 이 나라가 선거를 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후보자들이 수천만 원의 공탁금을 내는 일도 없다. 시민들은 의지가 있고 지지만 받을 수 있다면 누구나 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 유권자로부터 5% 이상의 지지를 얻으면 비례대표 의석도 배정받을 수 있고, 국고보조도 받을 수 있다.
독일인들이 가장 몰상식한 선거라고 지목하는 것이 바로 미국식 선거다. 선거가 막대한 자본에 의해 치러지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선거행태를 독일인들은 야만적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대놓고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살짝 자기들끼리 그렇게 말한다. 미국애들은 미쳤다고, 선거하는 데 왜 돈을 들이느냐고...
우리도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의 선거제도는 분명 잘못되어 있다.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
다음은 베를린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정당의 선거홍보물인데, 해적당 홍보물이 가장 재밌다.
구동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좌파당의 선거홍보물: 서로 적대하지 말고 함께 하자! 계산 기술자들 때문에 빈곤이 왔다. 그러니 빈곤의 악순환을 멈추자!
거대 정당들의 홍보물, 아래의 SPD(베를린은 똑똑해져야! 베를린은 세계에 열려있어야!)와 위의 CDU(베를린 정당명부의 1순위인 Frank Henkel. 학교를 더욱 안전하고 강하게! 더 많은 경찰을!) 이 선거홍보물을 보더라도 SPD와 CDU의 정책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폰 사진에 더 많이 잡힌 것을 보니 내 눈에는 SPD홍보물이 눈에 많이 띈 모양이다.
21세기에 들어서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해적당(Piraten)의 홍보물에는 민주주의, 투명성, 인권을 내세운다. "사람들이 참여하면 지식은 배가된다." 해적당이라는 이름 때문에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해적당은 지식과 정보화 시대의 개인정보보호와 지적 해적행위를 막기 위해 생겨난 정당으로서 매우 선한 활동을 하는 젊은이들로 구성된 진보적인 좌파 성격의 정당이다. 정당원의 평균 나이가 29세라고 한다. 좌파 정당인 Die Linke의 62세에 비교하면 어떤 정당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녹색당은 독일 현대사에 남긴 족적이 아주 크다. 독일에 있는 모든 핵발전소를 폐쇄시키는 데 혁혁한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