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와 계급적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품의제도
2016-09-03(토) 김용민 브리핑에 나간 [최동석 칼럼]입니다. 아래 링크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9938
[0903토①] 총선직전 북한종업원 탈북, 국정원 개입 확인
[페북에다 쓴 소개글...]
정부는 왜 조폭처럼 행동하는가? 품의제도 때문이다.
품의제도가 우리 사회를 지배와 통제, 명령과 복종, 억압과 착취의 계급적 위계질서를 고착시켜왔다.
품의제도는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이미 조직에 형성된 조직문화이며 그 조직이 내리는 관행적 명령이다. 이렇게 변화된 조직을, 미국의 투자자 워렌 버핏은 institutional imperative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이라고 말했다. 바꾸기 어렵다는 말이다.
품의제도는, 비록 일본인들이 고안한 것이었지만, 한국인의 정서에 아주 밀접하게 어울렸으며 가부장적 권위주의 문화에 잘 들어맞았다. 우리의 정신에 깊이 각인된 DNA같은 것이 되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나는 혁명이 일어나야 가능하다고 본다.
안녕하십니까? 최동석입니다.
1.
지난 칼럼에서는 품의제도는 일제 강점기에 근대적 행정체계를 확립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우리 민족의 고유한 것이 아니었음을 살펴봤습니다. 품의제도로 인해 군국주의적 조직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지배와 통제, 명령과 복종의 관행이 정착되었음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오늘은 품의제도의 본질적인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
조금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만, 몇 가지 개념들만 잘 파악하고 이 고비만 넘기면 박근혜 정부가 과거 제국주의 또는 군국주의 시대의 정부와 비교했을 때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3.
의사결정은 조직설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의사결정과 조직구조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 품의제도(稟議制度)입니다.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의사결정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고도의 정치적 행위입니다. 이해관계자들의 의사를 통합·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정치적 행위가 필요한 결정을 조직적 결정이라고 합니다.
4.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결정, 즉 조직적 결정은 대부분 타인의 이해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므로 반드시 합의를 거쳐야 합니다.
5.
그런데, 조직적 결정은 조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조직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조직이란 무엇인가? 조직론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설명합니다만 핵심은 이렇습니다. “조직이란 공동의 목표를 가진 구성원들의 협력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 기업, 시민단체, 협동조합, 가정과 같은 조직을 염두에 두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조직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6.
이제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부산행 KTX에 탄 승객들은 조직일까요? 부산까지 간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승객들의 집단을 조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승객들이 서로 협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조직의 정의를 반복해보겠습니다. “조직이란 공동의 목표를 가진 구성원들의 협력체입니다”.
7.
그러니까 조직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핵심입니다. 첫째,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 둘째,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는 협동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조직폭력배들의 집단은 어떻습니까? 조폭은 구성원들의 공동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들이 그 목표를 향하여 서로 협력합니다. 정의상 조직폭력배들의 집단도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장인들이 흔히 조직의 쓴 맛을 본다는 말을 합니다. 구성원들이 조직의 쓴 맛을 본다면, 그 조직은 선한 조직은 아닙니다.
8.
그러면, 어떤 조직이 악한 조직이고 어떤 조직이 선한 조직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합의의 원칙”입니다.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도 합의가 필요하며, 서로 협력하는 것도 합의가 필요합니다. 합의를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구성원들 간의 대화와 토론이 벌어져야 합니다. 원활한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지려면 상하관계의 계급적 질서가 아니라 서로 대등한 수평구조의 자율적 질서가 필요합니다. 조직 내의 계급장이 무력화된 상태라야 제대로 된 대화와 토론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죠.
9.
그런데, 조폭은 어떻습니까? 대화와 토론은 없고 보스의 일방적인 지배와 통제의 원리에 따라 조직이 움직입니다. 이렇게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대화와 토론을 통한 합의에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의해 선한 조직과 악한 조직으로 구별됩니다.
10.
그러니까 정부든, 기업이든, 시민단체든, 가정이든, 조폭이든 조직은 사회적으로 선한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악한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조직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어떤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피아 조직을 그린 ‘대부’라는 영화를 보면 조폭도 때로는 선한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고 정부도 악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김정은의 북한 정부가 그렇고, 히틀러의 나치 정부가 그랬습니다. 이것은 매우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이런 조직에는 권력을 가진 한 사람 또는 몇몇 사람에 의해 일방적으로 의사결정하는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10.1.
우리나라 재벌기업들도 자주 악한 결정을 내리곤 합니다. 어버이연합 같은 시민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은밀히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은 악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가부장적으로 일방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면 가정도 아주 나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조직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나쁜 사람들이라서 그 조직이 악한 조직이 된다기보다는 그 조직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조직이 악한 조직이 된다는 것입니다. 조직폭력배들의 집단이 악한 조직이 되는 이유는 폭력배들 때문이 아니라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악하기 때문에 그 조직이 악한 조직이 된다는 겁니다.
11.
결국,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그 조직을 악하게 만들기도 하고 선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매우 중요합니다. 품의제도는 아랫사람이 검토하여 의사결정을 위로 떠넘기면서 윗사람의 지배체계를 공고히 하는 의사결정 메커니즘입니다. 봉건시대에 생성된 이 품의제도는 제국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조직문화를 확고히 만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품의제도 하에 있으면, 그 구성원들이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군국주의적인 조직문화에 함몰되어 조직 전체를 악하게 만듭니다. 품의제도는 조직의 생산성과 창의성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적 성찰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12.
조직의 선악을 분별하는 시금석은,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을 통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가’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만, 합의 없는 조직적 결정은 악한 조직을 만듭니다. 그래서 정부의 결정은 반드시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 합의는 여당과 야당의 합의로 대체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의회민주주의죠.
13.
지금까지 국민적 합의가 없는 결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봅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부와 같은 과거 독재정부는 차치하고, 최근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는 어떻습니까? 국정원의 선거개입 의혹 사건, 간첩조작 사건, 정윤회와 문고리 삼인방 사건, 세월호 사건, 교과서 국정화 사건, 한·일간의 위안부 문제 합의,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우병우 민정수석 스캔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안건들이 국민적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심지어 증거 문서들을 만들지 않았거나 있는 것조차 감추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폭들의 행태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13.1.
요즘 동네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일일이 휴대폰으로 문자와 사진을 부모들에게 보내줍니다. 이 위대한 SNS 시대에 어린이집도 이렇게 매우 합리적으로 운영합니다.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운영 행태를 보십시오. 동네 어린이집 운영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습니까?
14.
어린이집은 여러 부모들이 참여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합의하여 결정하기 때문에 매우 효율적이고 투명하고 실용적으로 운영됩니다. 그러나 청와대는 권력을 가진 상층부 몇 사람이 자기들 맘대로 결정하여 하부 조직에 명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마치 조직폭력배들이 행동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던 히틀러의 나치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제국주의 군국주의 시대의 정부운영방식은 죄다 그랬습니다.
15.
오늘날 개명한 21세기에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시대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아직도 제국주의이고도 군국주의적인 습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품의제도 때문입니다.
15.1.
품의제도 하에 있는 일본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못하고 구태의 정치적 행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배와 통제, 명령과 복종을 강요하는 의사결정방식인 품의제도 때문입니다. 각자 자신이 맡고 있는 직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윗사람의 명령에 따라 구성원들이 움직이는 시스템입니다. 품의제도는 윗사람에게는 아첨과 충성심을 보이면서 아랫사람에게는 위세를 부리며 억압과 착취를 가능케 합니다.
16.
더욱 큰 문제는, 우리 사회는 이런 상황을 즐기는 완장 찬 중간층을 양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완장을 차지 못한 이들도, 상층부의 권력자들에게 빌붙어 먹을 수 있는, 완장 찬 사람들을 부러워하게끔 사회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해방 후 지금까지 오랜 세월 이런 식으로 나라가 운영되어 왔기 때문에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감정도 사라지고 양심도 사라지고 영혼의 능력도 마비되었습니다.
17.
똑똑한 대통령을 뽑는다고 해서, 품의제도를 없앤다고 해서(물론 없어지지도 않겠지만), 청와대의 구조를 바꾸고 비리에 연루된 환관 내시들을 내쫓는다고 해서, 대통령 중심제의 권력을 분산하는 의원내각제로 바꾼다고 해서, 이 심각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사회를 비관적으로 봅니다. 우리 세대가 살아있을 때, 과연 광명한 세상을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군국주의적인 습속을 강화시키는 품의제도의 폐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종전 후,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어떻게 해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시대의 습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