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어카운터빌리티와 컴피턴시 개념을 활용해야 한다
2016-10-29(토) 김용민 브리핑에 나간 [최동석 칼럼]입니다. 아래 링크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1029토①] 오늘은 혁명하기 좋은 날
이제는 어카운터빌리티와 컴피턴시 개념을 활용해야 한다.
안녕하십니까? 최동석입니다.
지난 칼럼에서 다음 시간에는, 인간존중의 사상과 철학에 근거한 에너지를 어떻게 축적하며 그것을 어떻게 인사조직론적으로 풀어가야 할지 살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주 내내 너무나 큰 사건들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새누리당 의원들과 그 측근들의 행태가 언론을 통해 봇물 쏟아지듯이 보도되었습니다. 박근혜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저 사악한 자들의 실체를 이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1.
결국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박근혜는 순수한 마음에서 최순실에게 도움을 받았고 보좌진이 갖춰진 이후에는 도움받기를 그만두었다고 해명했습니다. 오히려 이 해명으로 박근혜가 지속적으로 국민을 속여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동안 박근혜의 언어구사능력과 정신세계를 볼 때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박근혜 정부가 하는 발표는 어떤 말을 해도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2.
오늘 칼럼은 두 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첫째는 박근혜의 정신세계를 알아보는 것이고, 그러니까 왜 최순실 같은 사기꾼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둘째는 지금과 같은 국정마비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인사조직론적 관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두 주제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최순실 사건은 최태민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최태민에 대해 검색하면 그의 생애에 대해 수많은 자료와 기사들이 올라옵니다. 그는 사기꾼, 무속인, 수많은 성폭행 사건, 승려와 목사행세 등에 연루되어 왔던 자입니다. 언론은 박근혜의 육체와 정신을 사로잡은 최태민을 샤머니즘적인 신흥종교의 교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선 박근혜와 최순실의 관계를 간단히 보겠습니다.
3.
최순실은 최태민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물려받아 샤머니즘적인 사이비 종교의 제2대 교주쯤으로 행세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최순실은 최태민에 이어 박근혜의 육체와 정신을 통제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4.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박근혜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자기(self)가 형성이 되지 않은 미성숙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선거유세나 TV토론에서 박근혜의 언어구사능력은 정상인의 그것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박근혜가 수첩에 적은 내용이나 사전에 쓴 원고를 외워서 하는 말 이외에는 거의 정상적인 언어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산화까스, 산소까스라는 단어는 일반인으로서는 전혀 들어보기 어려운 말입니다. 매우 신비롭고 창조적인 단어입니다. 이제 말을 막 배우는 어린아이들이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미리 써준 원고를 읽을 때도 전화위복을 전화위기로, 위장전입을 위장전업으로, 인혁당 사건을 민혁당 사건으로, 지하경제 양성화를 지하경제 활성화로 읽습니다. 이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여기까지는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저도 제가 쓴 이 원고를 읽을 때, 발음이 엉키고 버벅 거릴 때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기자들이 곤란한 질문을 하면 “병 걸리셨어요?”라고 반문합니다. 또는 “온 우주가 나타나서 도와준다.”든지, “전체를 읽어보면 그런 기운이 돈다.”라는 말은 대단히 예사롭지 않은 대화입니다. 지식인 사회에서 결코 쓰이는 말이 아닙니다.
5.
다음과 같은 얘기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될 것은 이것이다 하는 것으로 정신을 차리고 나가면 우리의 그 어떤 그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해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셔야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2015. 5. 12 국무회의)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런 예는 꽤 많습니다.
“경제활성화 법들 이런 것을 열심히 해가지고 한 발씩 뛰다 보면 어느새 우리 경제가 살아나고 다시 뭐랄까 국민들 삶도 풍족해지고 가계부채 문제도 일자리가 많이 생기면 자연히 해소되고 이렇게 풀려나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2011.11.12. 새누리당 청와대 회동) 이게 뭔 말입니까?
6.
남이 써준 원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이 곧 박근혜의 지적 수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박근혜의 언어 사용을 두고 ‘베이비 토크’라고 지적했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수준의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언어구사는 인간의 성숙도와 지적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말하기와 글쓰기는 인간의 고등한 정신능력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박근혜는 5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언론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유튜브에 찾아보면, 그 사실여부를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피해서 제 얼굴이 다 뜨거워지는 장면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한 국가의 고위공직자들은 나라를 대표해서 일하는 것이지 개인 비즈니스를 하는 게 아닙니다. 굳이 외국어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통역을 쓰면 됩니다. 잘 못하는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허세를 부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박근혜가 이렇게 허세를 부리는 현상은, 심리학적으로 자존감이 결핍되어 인격적으로 미성숙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7.
김영삼은 박근혜를 칠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옛날 시골 동네에는 칠푼이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약간 맛이 간 애들이죠. 사람들은 병신이라고 놀리기도 하고 미쳤다고 하기도 합니다. 푼수를 모르고 날뛰면서 저지레 하는 아이들을 우리가 흔히 그렇게 부릅니다. 박근혜가 지금 꼭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는 아이를 고쳐보려고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 소용이 없죠. 오히려 가산만 탕진합니다.
8.
미쳤든 칠푼이든 욕망은 있습니다. 대통령의 딸로서 남보다 우월감을 드러내려는 허위의식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그럴만한 능력이 없을 때,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심리적 약점을 파고드는 종교가 바로 샤머니즘에 근거한 사이비 종교들입니다. 최태민과 최순실은 박근혜의 이런 심리상태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차떼기 정당이 된 한나라당이 완전히 국민적 공분의 대상이 되자, 박근혜가 당대표를 맡았습니다. 천막당사를 만들고 한나라당을 재건하는 소임을 거뜬히 잘 해냈습니다. 박근혜가 미쳤거나 칠푼이만은 아니었구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면, 박근혜를 보좌했던 유승민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승민이 한나라당에서 중책을 맡았고 박근혜의 비서실장도 했으니까요. 이런 과정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 중에는 박근혜가 좀 모자라는 사람 또는 칠푼이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9.
칠푼이 박근혜는 자신의 능력으로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라 둘러싸인 환경과 선전선동의 조작된 이미지로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이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제정신을 가진 청와대 보좌진이나 장관들이 어떻게 최순실 같은 사기꾼에게 자문을 받으려 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얘기죠. 그러나 아무도 박근혜의 권력을 견제할 수 없게 되자, 언제 누가 배신할지 모르는 배신의 트라우마를 회피하는 방향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의 판단력이 흐린 박근혜는 예전부터 깊은 관계를 맺어온 최순실에 더욱 기대게 됩니다.
샤머니즘은 일종의 기복신앙으로서 개인의 극단적인 이기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샤머니즘은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운 환경을 자기 스스로 극복할 수 없을 때, 초자연적인 힘에 기대 보려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커다란 사찰에 가면 사업번창, 대학 합격 등을 기왓장에다 써서 기원합니다. 개신교 대형교회들을 보십시오. 수능시험을 앞두고 100일 새벽기도회를 엽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게 바로 샤머니즘입니다. 이런 샤머니즘은 우리 민족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깊이 침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시원인 알타이 족속의 세계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수천 년 동안 샤머니즘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아직까지도 이런 미신과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이것이 마치 우리의 오랜 전통이며 계승되어야 할 문화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국회에서는 아예 굿판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새누리당 국회의원 이름으로 예약된 국회의원 회관에서 역술인협회가 '제2회 2016 병신년 합동 국운 발표회'를 개최했죠. 사전행사로 재수굿을 시작했으나, 국회사무처에 사전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국 중도에 그만두긴 했습니다.
박근혜의 육체와 정신을 사로잡아서 좌지우지했다는 최순실의 노트북에는 오방낭이라는 폴더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대통령 취임식 후 광화문에서는 그 오방랑을 이용한 제막식을 최순실이 기획했다고 합니다. 우주와 인간을 이어주는 기운을 가졌다는 오방낭의 방향이 잘못되었고 싸구려 변칙 주머니였다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저 무당스러운 기운을 가득 담은 샤머니즘 퍼포먼스를 상징하는 오방낭조차도 사이비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샤머니즘 업계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세계일 뿐입니다.
지배층의 억압과 착취로 민중의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던 조선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사조직론적 사고에 의해 사회를 구조적으로 개혁하려는 생각보다는 점쟁이들의 점괘, 무당들의 굿판, 명리학이나 풍수지리의 해석에 의지하며 민중은 겨우 겨우 삶을 살아냈습니다. 당시에는 예언가들의 예언을 믿는 도참사상이 창궐했습니다. 다양한 샤머니즘 의식에 기대어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불안심리를 조금이라도 해소해보려는 풍조가 성행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의 기억이 있습니다. 가난한 환경 때문에 어찌해볼 수 없는 사람들이 화투장가지고 운세를 점치거나 토정비결을 보곤 했습니다. 그저 놀잇감으로 그러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그렇게 되리라 믿었습니다. 이것은 그 사회가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는 미성숙한 인격에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오늘날 대학을 나오고 배웠다는 사람들 중에도 점쟁이를 찾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현실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는 점, 그리고 인간과 조직, 사회와 세계에 대한 인식이 매우 미성숙한 상태에 있다는 점입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개명한 세상에서 아직도 샤머니즘에 기대고 있는 겁니다.
박근혜는 샤머니즘에 기대어 살아왔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최순실은 점쟁이요, 무당이요, 사이비 교주 노릇을 하는 사람입니다. 무당들의 특징은 이전 칼럼에서도 언급했듯이 반신반인의 상태가 된다는 점입니다. 이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면 큰 위해가 닥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아주 질이 나쁜 사기꾼인데요, 우리나라와 같은 환경에서는 까딱하면 이런 사람들에게 말려들게 됩니다.
영화 <곡성>을 봐도 아시겠지만, 무당은 반신반인 상태가 됩니다. 칠푼이 박근혜를 등에 업고, 반신반인의 역할극을 꾸민 극단적인 이기주의자 최순실의 행태를 보십시오. 기회가 왔을 때 챙길 수 있을 만큼 챙겨야 하지 않겠어요? 대기업들의 손목을 비틀어 재단을 설립해서 그 재단 수익금을 최순실이 다 빨아가는 구조를 만든 것이지요.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체를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샤머니즘을 극단적인 이기심에 기초한 신앙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이런 샤머니즘으로부터 아직은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는 점, 제사, 굿, 명리학, 풍수지리, 사주팔자, 궁합 등에 아직도 상당히 묶여 있습니다.
최순실과 가까이했던 사람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호스트바에 들락거리던 사람들 아닙니까? 박근혜도 박정희의 딸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그런 사람들과 어울렸을 사람입니다. 어쩌면 반신반인의 행세를 하고 다니는 무당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10.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어째서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이 박근혜가 칠푼이라는 사실을 몰랐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칠푼이를 대통령으로까지 밀어 올릴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11.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첫째 부류는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 밖에는 모르며, 정보에 어둡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선전선동에 좌우되는 사람들입니다.
12.
문제는 두 번째 부류입니다. 이 부류는 김종인, 이상돈, 유승민, 남경필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밖의 박근혜를 옹호하는 새누리당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칠푼이를 이용해 먹으려는 인간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박근혜가 칠푼이라는 사실을 과연 몰랐을까요? 알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칠푼이를 세워놓고 뒤에서 자신들이 권력의 한 축을 잡아서 뭔가를 도모해보려고 했겠죠. 권력을 휘둘러보겠다는 욕망에 미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사람들이 사회악의 근원입니다.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에도 꼭 이런 사람들이 준동하여 권력을 등에 업고 민중의 피를 빨아먹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주제인 인사조직론적 사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3.
인사조직론적 사고는 직무와 직무담당자를 구분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대통령은 하나의 직무입니다. 장관도, 국회의원도 하나의 직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각 직무는 어카운터빌리티(accountability)라고 하는 고유한 역할과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는, 직무의 어카운터빌리티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이며, 이 어카운터빌리티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컴피턴시(competency)를 갖춘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두 번째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인사조직론의 핵심개념은 어카운터빌리티와 컴피턴시입니다. 컴피턴시 개념은 높은 성취를 가능케 하는 능력요소를 말하는 것인데 뒤에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14.
여기서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 부류의 <칠푼이를 이용해 먹으려는 인간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득세를 위해 칠푼이를 대통령으로 옹립했습니다. 조선왕조가 쇠퇴한 것은 이런 칠푼이 같은 10대의 어린애들을 임금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들 맘대로 나라를 좌지우지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악한 의도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사조직론적 사고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공맹사상을 밤낮 가르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으니까요. 500년을 넘게 공맹사상을 가르쳤던 조선시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시대 지배층은 칠푼이 같은 어린애들을 임금으로 앉혀놓고 외척세력이 득세하여 국정을 농단해왔습니다. 이 둘째 부류의 <칠푼이를 이용해 먹으려는 인간들>은 박근혜를 앉혀 놓고 자신들이 맘대로 주무를 수 있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박근혜 같은 칠푼이를 대통령이 되도록 노력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박근혜가 칠푼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그 사람들도 역시 박근혜보다도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들일 것이고, 만약 그 사실을 알고도 박근혜를 대통령이 되도록 노력했다면, 그들 역시 사기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
유럽인들이 수백 년 동안 시행착오를 걸쳐 발전시켜 온 인사조직론적 사고를 우리가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사건, 사고, 스캔들은 대부분 인사조직론적 사고의 결핍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법적인 권력을 가지고 인사조직론적 사고를 말살해온 박정희와 박근혜의 등장은, 민주주의를 그토록 갈망했던 우리 현대사에 큰 비극입니다.
우선 대통령이라는 직무는 어떤 성과책임 또는 설명책임을 가지고 있는지 그 어카운터빌리티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모든 공적 직무는 그 직무가 완수해야 할 역할과 책임이 명백하게 문서화되어 있어서 그 근거에 따라 직무수행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역할과 책임을 벗어나면 그것은 범법행위가 됩니다. 우리 조직에는 이런 어카운터빌리티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조직에는 구성원들을 무조건적인 상명하복의 쇠사슬로 묶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사건사고, 부정부패 스캔들의 원인입니다. 각 직무다 고유한 어카운터빌리티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관이라도 부하의 고유한 어카운터빌리티를 무시하고 지시와 명령을 하면 저항하거나 거부할 수 있게 됩니다.
장관들을 보십시오. 대통령에는 방끗 웃는 얼굴을 내밀고, 국민을 향해서는 궁둥이를 내미는 자세를 늘 취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습니다. 그러면 장관들은 받아 적습니다. 토론은 없고 일방적 명령과 지시만 있습니다. 그럴 거라면 뭐 하러 모입니까? 그냥 프린트해서 나눠주고 읽어보라고 하면 될 일입니다. 회의는 서로 다른 의견을 맞추어보는 과정입니다. 박근혜식 국무회의는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16.
우리 정부조직이 이렇게 황당하게 망가진 이유는, 대통령이라는 직무에 너무나 과도한 권력을 몰아주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는 대통령 직무의 담당자로서 그토록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카운터빌리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요.
17.
한번 비교해 봅시다. 독일 연방정부의 총리라는 직무는 그 직무를 맡은 앙겔라 메르켈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연방장관들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고 통제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총리 직무는 연방장관이라는 여러 직무들과 국정의 주요 안건들을 토론하여 최적의 합의안을 마련하는 어카운터빌리티가 부여된 자리입니다. 대통령제의 대통령이든 내각제의 총리든 제도상의 차이일 뿐 일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어카운터빌리티는 같아야 합니다.
18.
인사조직론 차원에서 독일 연방정부의 의사결정방식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소관업무의 원칙(Ressortprinzip)입니다. 이 원칙은, 총리가 각 연방장관이 맡은 고유한 업무에 대해 무작정 이래라저래라 지시·명령할 수 없다는 원칙입니다. 각 장관에게는 소관업무의 어카운터빌리티가 정해져 있으니까요. 둘째 합의의 원칙(Kollegialprinzip)입니다. 내각에서 합의된 사안에 대해서는 총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부할 수 없다는 원칙입니다. 내각의 합의에 총리가 굴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총리는 내각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19.
그러면 총리는 뭘 하는 자리인가? 내각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능은 당연합니다. 나아가 시민의 관점에서 가장 의미 있는 정치적 정책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 있는 기능이 총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총리가 하는 말은 당연히 모든 언론이 주목하게 되며, 총리는 포괄적으로 국민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집니다. 물론 이러한 기능은, 모든 국가권력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라는 헌법적 명령에 기초합니다. 이것은 총리에게 부여된 커다란 특권입니다. 이것을 소위 총리의 원칙(Kanzlerprinzip)이라고 합니다.
20.
하위조직인 각 연방정부 부처에서도 이와 같은 의사결정의 원칙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러니까 상관이라고 해서 직원들에게 무작정 명령을 내릴 수 없습니다. 왜냐? 각자 자신의 직무에 고유한 어카운터빌리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관이라 하더라도 부하직원들의 업무수행에 함부로 간섭할 수 없습니다.
항상 토론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업무스타일과 아주 유사합니다. 이렇게 인사조직론의 세세한 부분을 학습하지 않아도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조직운영을 위한 리더십의 큰 원칙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 국민의 인사조직론적 사고에 대한 학습이 필요합니다. 인사조직론적 사고의 핵심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는 방금 언급한 직무의 고유한 성과를 나타내는 어카운터빌리티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어카운터빌리티를 맡은 직무담당자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컴피턴시 개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컴피턴시를 역량이라고 번역하는데, 이 번역어를 아무렇게나 쓰는 바람에 많은 오해가 생기고 있습니다.
21.
그러나 박근혜는,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수준의 인사조직론을 이해할 수 있는 컴피턴시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칠푼이를 대통령의 자리에 밀어 올린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그들이 이번 최순실 사건의 진정한 범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
정리하자면, 직무와 관련된 어카운터빌리티 개념과 직무담당자와 관련된 컴피턴시 개념이라는 두 개의 바퀴에 의해 조직이 굴러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 두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23.
컴피턴시란 탁월한 성과의 원인이 되는 재능만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정비한 능력요소들을 말합니다. 이 컴피턴시는 타고난 능력이기 때문에 후천적인 노력으로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중대한 사건(critical events) 속에서 보여준 행동패턴은 미래에도 재현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어떤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 어떤 의도로, 어떤 행동을 해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를 알 수 있다면, 미래의 유사한 상황에서도 과거의 행동패턴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인의 성취수준을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거죠.
24.
이명박 예를 보겠습니다. 과거 현대건설에서 여러 중요한 사건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살펴보면, 대통령이 되었을 때의 행동패턴을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결국 국가를 수익모델로 이용해 먹었습니다. 제 버릇 개 못줍니다. 박근혜의 예도 똑같습니다. 과거에도 최태민, 최순실에 놀아났거든요. 저는 이 분야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뻔히 보이는 겁니다. 저는 어카운터빌리티와 컴피턴시 개념이 우리 사회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25.
그래서 이번에 컴피턴시 개념을 활용한 <성취예측모형 워크숍>을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컨설팅을 하거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인사조직담당자들에게만 가르쳐왔던 내용입니다. 11월 12일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5시간씩 4주에 걸쳐 총 20시간짜리 공개적인 워크숍을 진행합니다. <사람숲협동조합>에서 주최합니다.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은, 참가비가 있습니다만, 많이 참여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함께 컴피턴시 개념을 공부합시다. 그래서 다시는 이명박, 박근혜와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칠푼이를 이용해 먹으려는 인간들>이 정치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합시다.
다음 시간에는, 인사조직론의 기초는 인간존중의 사상과 철학이며, 이것이 어떻게 인사설계와 조직설계에 반영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어카운터빌리티와 컴피턴시를 우리말 번역어를 쓰지 않고 외국어를 그대로 쓰는 바람에 마음이 언짢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외국어의 번역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입니다. 아직 그 개념이 우리말로 정착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마다 여러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카운터빌리티는 성과책임/설명책임 또는 역할/책임 등으로 쓰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런 우리말도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런지는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추후 설명하겠지만 이 칼럼에서도 그 이유를 조금은 설명하겠지만, 이번에 11월 12일(토)부터 진행하는 <성취예측모형 워크숍, Achievement Prediction Model(APM) Workshop>에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할 예정입니다.
컴피턴시의 경우에는 더욱 오해가 많이 생깁니다. 역량(力量)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능력(ability), 재능(talent), 소질(traits), 특기(specialty), 성향(disposition) 등과 어떻게 다른지 이런 용어들을 엄밀히 정의하려면 긴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역량(力量)의 사용 예를 살펴보면, 능력, 재능, 소질 등과 같은 다양한 번역어에다 조금 멋을 부리려고 역량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컴피턴시 개념이 매우 부정확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10분 정도의 칼럼에서 이런 내용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개념의 정확성 때문에 고민해본 분들은 무슨 뜻인지 이해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주 논란이 되는 거버넌스(governance)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우리말로 "지배구조"라고 번역하곤 합니다만, 이거야말로 매우 부정확한 번역어입니다. "협치"라고도 번역하는데 이것 또한 정확한 개념은 아닙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칼럼을 통해 우리말의 확장을 위해서도 이런 외국어를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번역자들은 번역용어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그 노력이 오히려 더 헷갈리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self-realization을 자아실현(自我實現)으로 번역된 것은 자기실현(自己實現)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 큰 오해를 일으킵니다.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ego를 자아(自我)라고 번역해야 하고, self를 자기(自己)로 번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ego는 인간의 사회화과정에서 self에게 들러붙은 욕망의 덩어리를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양언어에는 ego-realization(자아실현)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이런 오해를 확대시키느니, 차라리 외국어를 그대로 쓰고 번역할 때 왜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좋은지를 충분히 설명한 후에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충분한 설명이 없이 그냥 즉흥적인 번역어를 쓸 때 혼란을 줄 수 있는 경우는 일단 서양어를 그대로 쓰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경영학 용어들이 서양문화와 문명 속에서 발전된 개념이어서 우리의 문화와 맥락에는 적합한 단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어카운터빌리티와 컴피턴시 개념을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생각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