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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Sep 20. 2015

이렇게 독일을 만났다

대략 30년 전, 1986년 여름 독일의 첫인상은 너무나 강렬했다

이렇게 독일을 만났다

대략 30년 전, 1986년 여름 독일의 첫인상은 너무나 강렬했다



유럽의 난민 수용 이슈로 독일이 뜨고 있는 모양인데, 독일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유학생활을 해본 사람으로서 독일 얘기를 조금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서 공부하면서 살면서 애들 키우면서 여행하면서 경험한 것들을 심심할 때  두서없이 써보려고 한다. 독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온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라 "거의"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놀랄 것이다. 그게 독일 이야기다.


물론 영국 이야기도 조금은 할 것이다. 영국은 아주 나중에 2007년 여름에 처음으로 만났는데, 독일과는 다른 측면이 많아서 그런 얘기도 좀 하고, 마침 딸이 영국에 사는 바람에 자주 가게 되고 그곳 사람들과도 교류를 할 수밖에 없으니 할 얘기가 조금은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게 영국 이야기다.


1986년 전두환 정권 말기여서 서울시내는 곳곳에 최루가스가 매연과 섞여 음산하고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소공동 일대는 보도블록 깨진 쪼가리들이 늘 나뒹굴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전초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으니까.     


1981년 한국은행에 들어간 나는 1986년에도 여전히 금융부실거래자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금융사기꾼들의 금융거래를 정지시키고, 재산을 빼돌리지 못하게 세무당국에 요청하고, 출국을 금지시키기 위해 법무부에 통보하고, 그런 사람들 중에는 가끔 한은 총재와 은감원장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사람도 있어서 변호사를 시켜 응소하고, 등등의 일을 반복했다. 지금 생각하면 뭐, 별로 영양가도 없고 쓸데없어 보이는 일들을 몇 년간 반복하고 있었던 셈이다.      


내가 그 당시 얼마나 일을 잘했는지 모르겠는데, 윗사람들이 나를 잘 봤는지 어쨌는지, 그해 여름 한국은행 직원 신분으로, 그러니까 관용여권으로 서독 연방은행에 연수를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한은 직원들도 관용여권을 썼다. 해외연수라는 게 아주 귀하던 시절이었다. 여름에 가서 가을에 돌아오는 몇 개월 일정이었다. 막상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보니 연수할 것이 거의 없었다. 배울 것이 없었다기보다는 우리나라와 금융시스템이 워낙 달라서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독일 연방은행_프랑크푸르트


서독 연방은행의 구내식당은 건물 1층 중앙에 있다. 식당으로 들어가기 위해 복도를 따라 쭉 가다가 오른쪽을 꺾었다가 다시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복도를 걸으면서 정면에 마주치는 커다란 지도가 있는데 독일제국(Das Deutsche Reich, 1871~1918) 당시의 영토를 나타낸 것이다. 연방은행의 모든 직원들은 이 지도를 보면서 점심을 먹으러 간다. 이 지도가 나에게는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다. 어느 날엔 혼자 물끄러미 이 지도를 쳐다보기도 했다.


독일제국 시대의 영토. 프랑스지역의 알자스로렌 지방과 슐레지엔을 포함한 폴란드지역의 대부분을 포괄하고 있다.


서독은 금융시스템을 운영하는 규정이 아주 간단했다. 한 줄 문장으로 금융기관의 여신관리가 척척 돌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당시 우리나라 금융시스템을 규정하는 것은 너덜너덜해진 걸레쪼가리만도 못했다. 규정과 통첩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만큼이나 많았고 복잡했다. 그걸 죄다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금융사고가 날 때마다 규정과 통첩에 온갖 조문과 지시사항을 추가해왔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연배가 있는 분들은 다들 기억할 것이다. 이철희 장영자 사건, 영동개발 이복례 사건, 제세산업 신선호 사건 등등... 이런 대형사건은 언론보도로 알려졌을 뿐, 이런 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수많은 사건들이 수면 아래에서 터지던 시절이었다. 박정희의 독재가 억눌러 놓았던 금융부실거래들이 박정희가 죽자 우후죽순처럼 터져 나온 것이었다. 나의 20대 후반은 그런 일들에 쌓여 지냈다.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일했다.


연수할 것도 별로 없으니 프랑크푸르트 시내라도 구경해야 할 텐데, 일주일이면 대충 다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가난한 신혼살림에 원거리 유럽여행경비를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데 연방은행 직원이 나에게 독일어 연수를 보내줄 테니 가겠냐고 물었다. 기왕에 독일에 왔으니 독일어 공부를 하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옳다구나, 가겠다고 했다.      


나는 이미 한국은행에서 연수비를 받아서 이곳에 왔다. 연방은행이 독일어 연수과정에 보내면서 또다시 연수비를 챙겨주는 것이 아닌가? 이중으로 연수비를 받고 나니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연방은행은 나를 독일 남부 뮌헨에서 잘츠부르크 사이에 있는 프린 암 킴제(Prien am Chiemsee)라는 도시로 보냈다. 여행객 중에는 이 작은 도시를 가본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바이에른 주에서 가장 큰 호수가 킴제(Chiemsee)인데, 그 킴제에 붙어 있는 도시다. 도시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작은 마을이다. 인구가 1만 명도 채 되지 않은 독일의 전형적인 휴양지였다. 킴제는 한가운데 섬(헤렌인젤, Herreninsel)이 있는 호수다. 그 섬에다 바이에른의 왕이었던 루드비히 2세가 자신의 여름 궁전을 짓는 바람에 유명해졌다. 그는 자신의 여름 별장을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서 만들었다. 그 궁전을 노이에스 슐로스 헤렌킴제(Neues Schloss Herrenchiemsee)라고 부른다. 프린 암 킴제(Prien am Chiemsee)는 킴제라는 아름다운 호수와 그 한가운데 왕의 궁전이 있는 섬과 그리고 멀리 알프스의 만년설이 보이는 마을이다.


노이에스 슐로스 헤렌킴제(Neues Schloss Herrenchiemsee)에서


킴제(Chiemsee)


노이에스 슐로스 헤렌킴제(Neues Schloss Herrenchiemsee)
우리 부부는 귀국한지 18년 만에 여름휴가를 독일에서 보냈다. 프린(Prien am Chiemsee)의 호숫가를 잊을 수가 없어서 다시 찾았다... 2011-08-01 오후


최루가스와 매연, 깨진 보도블록, 밤샘 야근 등으로 얼룩진 삶에서 벗어나 프린 암 킴제(Prien am Chiemsee)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여기가 천국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 천국은 아니어도 적어도 구백국 정도는 됐다. 사람들은 한없이 친절했고, 내가 시골길에서 방향을 잃고 헤맬 때 어김없이 누군가 나타나서 도와주었다. 독일문화원 괴테 인스티투트(Goethe Institut)에 등록하고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과 같이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독일이라는 나라를 이렇게 강렬한 첫인상으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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