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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Oct 24. 2015

우리 대학에 자본주의 광풍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는가?

우리 대학에 자본주의 광풍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는가?



자신이 학비를 내고 다닌 대학의 도서관을 이용하려면 연회비를 내야 한단다. ("대학 도서관에 부는 월세 바람"을 참조) 이 기사를 보고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다. 대학이 더 이상 미치지 않도록 하려면, 학생들이 연대하여 저항해야 한다.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혁명은 보다 더 평등한 세상을 요구하면서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강력한 투쟁이었다. 그야말로 혁명의 물결이었다. 프랑스가 뒤집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계급화되어 있던 프랑스 대학들이 거의 독일 대학과 비슷한 수준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68 혁명에 영향을 받은 독일에서는 학생과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 한층 더 많은 민주주의(mehr Demokratie, more democracy)와 기회의 평등을 요구했다. 이런 물결은 독일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종식시키고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가 이끄는 사민당으로 정부가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 대학에서 학생들이 무상으로 공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란트 총리가 이끄는 사민당 정부는 소위 연방장학금지급법(Bundesausbildungsförderungsgesetz, BAföG)을 제정하여 대학생들에게 생활비까지 보조해주었으며 이 제도와 관행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은 그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대충 매월 80~100만 원 정도를 지원해준다고 들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독일 정부가 대학생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 현실사회를 보다 더 이상적인 사회로 바꿀 수 있도록, 대학생활을 통해 그것을 미리 체험해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대학의 이념과 사명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졸업 후에 취직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대학생활과정에서 보다 더 아름다운 사회,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맘껏 발현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전 연습을 하는 곳이 대학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그저 기능적인 직장인을 생산하는 곳이 대학이라면 우리 사회에 어째서 대학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노량진에 있는 취업학원이면 족하지 않은가? 취업학원이나 대학이나 그 역할이 비슷하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대학제도를 위해 정부가 많은 예산을 쏟아 붓고 있는가?


이제 정치인들은 대학에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말해야 한다. 더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68 혁명 당시처럼 우리나라 교육은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1980년대 유학생활을 할 때도 독일 정부는 외국인 학생인 나에게까지 집세보조비와 자녀양육보조비를 지급해주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말이다. 독일 정부가 나에게 그렇게 지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당시에도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내가 독일에서 공부하는 동안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나의 연구에 소홀하지 않도록 하라는 배려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유학기간 내내 얼마나 열심히 배우고 연구에 힘을 쏟았겠는가?


독일은 돈이 많아서 그렇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 속에서 나라를 재건할 때부터 무상교육을 실시해왔다. 동서독이 갑자기 통일한 이후 극심한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생들에 대한 지원제도는 결코 줄이지 않았다. (물론 통일 후 일부 주에서는 대학 등록금을 상징적으로 학기당 50~70만 원 정도 받기도 했지만 학생들이 연대하여 봉기함으로써, 다시 말하자면 투표를 통해 정치인들을 심판하는 바람에 상징적이나마 받았던 등록금마저 사라졌다.)


독일의 고위 관료들과 정치인들은 장기적으로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건전한 정신을 유지시키면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사회에 대하여 공헌하려는 정신으로 피드백될 것이라는 점을 믿고 있었다. 유학 당시에 실제로 내가 만났던 독일을 이끄는 고위 관료나 정치인들에게는 무의식적인 채무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 당시 나와 함께 공부했던 독일친구들은 지금 독일의 경제계와 산업계에서 다들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들과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그동안 받아왔던 혜택을 어떤 형태로든지 되갚아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감 같은 것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많은 급여를 받고 있다. 그중의 상당 부분, 즉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세금과 준조세로 국가가 걷어가고 있지만,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것을 이웃과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와 저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육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인 것이다. 정부를 운영하는 고위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정신이 글러먹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점차 경제적 불평등이 교육의 불평등으로 연결되고 있으며, 그것이 다시 전반적인 삶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아가 그런 사회적 불평등이 자손으로 세습되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나는 몇 년간 한국장학재단의 혜택을 받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멘토 역할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재단의 지도자 멘토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해 봄에 Y대학교의 총장이라는 사람이 멘토들에게 했던 특강을 듣고는 아예 이 프로그램에서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대학이 현재 세계 몇 위의 대학인데, 명실상부한 100위권 안에 들어가는 대학이 되려면 적어도 얼마의 돈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가 특강의 핵심이었다. (나는 대학에 등수를 매기는 이 미치광이 같은 짓을 집어치워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을 서열화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런 인간을 인간 되게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서열화 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 총장은 미국 사립대학들의 재정능력을 비교하면서 지루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사람이 어느 유명한 교회의 장로라고 한다. 그는 대학생들과 멘토들에게 돈이 곧 세상의 전부라고 가르치는 것과 진배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가르침 후에 분임토의가 있었지만, 그 총장의 특강 내용에 대해 누구도 저항하지 않았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내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멘토 역할을 그만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이런 글러먹은 정신의 소유자들이 우리나라 대학을 이끌고 있다는 점과 취업에 허덕이고 있는 멘티들을 보면 속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런 현상 앞에 무기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추천서를 부탁하는 몇몇 멘티들에게 내 추천서가 기업에서 아무 효험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써 준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멘티들에게는, 대학사회가 정말 잘못된 곳으로 가고 있으니 독일 학생들처럼 연대하여 봉기하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나도 절망하고 있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만, 멘토의 역할도 그만두고 말았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서, 등록금을 내고 다닌 졸업생들에게까지 도서관 이용료를 추가로 징수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전국 242개의 지방자치단체에 각각 10개씩 도서관을 지어 영원히 운영할 수 있는 자금 22조원을 강바닥에다 날려버리더니, 이제는 도서관 이용객들에게까지 돈을 받겠다는 것이로구나. 돈에 눈이 멀지 않은 다음에야 어찌 이런 일을 기획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학과 도서관이 최소한의 사회적 역할마저 포기하고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발상을 한단 말인가?

 


대학의 경영진과 교육부 관료들에게 묻겠다.
"너희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인간들이냐?" 
박근혜와 새누리당에게 묻겠다.
"너희들이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했던 그 반값 등록금은 어떻게 되었느냐?"




갤러리

2011년 여름휴가를 독일에서 보내는 중, 모교인 기센대학교 경제경영대학을 다시 찾았다.  교수연구실 중 일부
오른쪽 2층이 지도교수 연구실. 이곳에는 비서와 조교수들뿐 아니라 박사과정 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방이 마련되어 있다. 나는 문헌자료가 풍부한 도서관에서 주로 지냈다.
독일 기센대학교 경제경영대학의 행정건물. 햇볕이 좋은 날에는 남녀할 것 없이 웃통을 벗고 이 잔디밭에 누워있다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늙은 학생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내 젊은 시절을 불살랐던 그 도서관. 예전에 앉아서 공부하던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독일 정부는 나에게 생활보조금을 지급하면서 공부와 연구에 집중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도서관은 어떤 문헌이라도 내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그것을 찾아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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