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0일, 9년 전 오늘 김예슬 고려대 자퇴 선언문
[페북에 쓴 글]
9년 전 오늘, 그러니까 2010년 3월 10일 김예슬이라는 고려대 경영학과 학생이 대학을 거부한다는 선언을 하고 자퇴했다. 다들 의아했겠지만, 내가 한양대에 있을 때였는데, 드디어 올 것이 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대학의 필요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요즘 부쩍 기존 대학의 종말이 눈앞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유럽 중세에 수도원이 대학으로 바뀌었고, 인터넷이 없던 19세기 서양에선 근대적 의미의 대학들을 세웠다. 목적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20세기 후반부터 대학의 존재목적이 바뀌었다. 대학은 자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인재, 즉 자본가의 이득을 위해 새로운 피를 공급해주는 인재를 양성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human dignity)은 사라져야만 했다.
김예슬은 대학의 경영학과를 다니면서 3년 만에 그 눈치를 채고 대학을 거부한 것이다. 지혜로운 학생이었다.
이젠 인터넷에서 무료로 거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 저토록 부패하고 무용하고 학생들을 착취하기까지 하는 대학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소규모 동아리 또는 공동체나 협동조합으로 모여서 학습하면서 소통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인 시대가 되었다. 온갖 쓸모없는 자격증이나 학위증이 작동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대학은 사라질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고졸이라는 학력으로도 김예슬은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 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한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5년 동안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는 의무 교육의 이름으로 대학의 하청 업체가 되고,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 업체가 되었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우리들 20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 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체제를 떠받쳐 온 내 작은 탓을 묻는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
요즘 김예슬은 이렇게 살고 있다. 행복하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