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신뢰의 유지가 중요하다
참고: 이글은 2015-08-24 페이스북 담벼락에 썼던 글입니다. 브런치에 다시 올려봅니다.
아내와 결혼해서 벌써 33년을 살았습니다. 그래도 한 여인과 꽤 오래 산 셈입니다. 그동안 딸과 아들을 낳았습니다. 나는 애들 키우는데 신경 쓸 겨를 없이 바쁜 세월을 살았습니다.
신혼 초에는 가난했기 때문에 그 흔한 유모차도 없이 애들을 키웠습니다. 어릴 적 애들이 사 달라는 장난감도 거의 사주지 못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딸은 마트의 캐시어가 되고 싶어 했고, 아들의 장래희망은 버스 운전사였을 겁니다. 내 기억으로는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고 학년이 높아지는만큼 현실에 대한 불만도 커지는 듯했습니다. 그러자 유학을 보내주면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나 어짼다나, 졸라댔습니다.
마침 20년간 다니던 한국은행을 떠나 컨설팅회사에서 일할 때라, 두 아이 유학비용 정도는 너끈히 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딸은 영국으로, 아들은 미국으로. 그 사이 아들은 군대도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해서 나의 뒤를 따라 은행원이 되었고, 딸은 돌아오지 않고 영국에 남아 은행원이 되었습니다. 우리 집안에는 은행원의 피가 흐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영국에 남은 딸은 영국 남자와 사귀더니 급기야 결혼하겠다고 통보해왔습니다. 아내는 지난 몇 년간 결사적으로 뜯어말렸습니다. 한국으로 불러들이려고 좋은 신랑감을 구해 선을 보도록 주선하기도 했습니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내 딸이 서양 놈과 놀아나는 것을 볼 수 없다', '친척들 보기 민망하다', '손주들이 혼혈아가 된다는 말이냐', '그 꼴을 어떻게 보겠느냐',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데 결국은 영국 놈이 채간다는 말이냐', '억울하다', '딸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등등 법석을 떨었습니다. 지금은 누그러졌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이런 반응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나였습니다. 그동안 아내가 약간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은 가지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강력한지 그제야 알았습니다.
나는 적당한 기회가 나타날 때마다 아내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세상을 더 크게 볼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세계화되었다', '인류가 모두 한 식구처럼 사는 날이 곧 오지 않겠느냐'(이건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긴 하다), '친척들 중에도 외국인과 결혼해서 잘 사는 사람도 있지 않느냐'(실제로 처가의 친척 중에 한 분이 영국인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자식들이 부모의 소유물이 될 수는 없지 않느냐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잘 개척해 나갈 것이다'(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각자의 삶은 스스로 개척해서 살도록 끊임없이 가르쳐왔지만 막상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나 역시 슬픈 감정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아파트에도 외국인과 국제결혼한 부부들이 꽤 많지 않느냐'(실제로 바로 우리 앞집도 미국인과 결혼한 한국인 부부가 살고 있다), '자식이란 어차피 부모를 떠나서 살아가는 것이다' 등등의 말로 위안을 주었지만... 이런 감정이 말로 해결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런던으로 여름휴가를 가서 몇 차례 만나보니, 남자친구가 딸을 대하는 극진한 자세를 보고 아내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해부터 휴가를 떠날 때는 그 남자친구의 선물도 미리 준비하곤 했습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정이 드는 모양입니다. 이제는 완전히 사윗감으로 인정하게 되었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보수와 진보란 무엇인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보수와 진보는 단순한 견해 차이나 후천적 학습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 태어날 때 본능에 각인되는 DNA 프로그램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애지중지 키웠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우리 애들은 강남의 헬리콥터 맘이나 잔디 깎기 맘에 비하면 그냥 놔~먹였다고 하겠습니다. 공부하라고 다그친 적도 거의 없고 각자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라고 해왔으니까요.
어떻게 만났냐고요? 딸은 원래 경영학을 공부했는데, 사무실에서 법률문제를 많이 다루다 보니 은행에서 주말과정으로 개설된 로스쿨을 보내주었답니다. 그 로스쿨 주말과정에서 함께 공부하다 만났답니다.
이글을 읽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딸이 영국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어떤 남자냐에 달려있겠지요. 골프를 무지하게 좋아하는 영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딸과는 동갑내기입니다. 지금은 영국계 컨설팅회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