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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Feb 05. 2021

《성취예측모형》 프레임워크(1)_도구적 역량군_사실발견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는지, 1호 공약이었던 검찰개혁조차 제대로 이루어질지 의문인 상태다. 공수처의 활동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진실로 의문이 든다면 이 시리즈 글을 차분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사태는 《성취예측모형》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2021년 들어서면서부터 지금까지 《성취예측모형》과 관련하여 글을 써왔다. 다음과 같은 소개글들을 읽어보면 앞으로 쓸 많은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앞에서부터 읽으면 《성취예측모형》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대강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21.01.11._〈사람 보는 안목〉을 기르자(1)

https://www.facebook.com/dongseok.tschoe/posts/10214164937957199     

2021.01.12._〈사람 보는 안목〉을 기르자(2)

https://www.facebook.com/dongseok.tschoe/posts/10214173966982919     

2021.01.21._〈사람 보는 안목〉을 기르자(3)

https://www.facebook.com/dongseok.tschoe/posts/10214209222264279     

2021.01.26._《성취예측모형》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https://www.facebook.com/dongseok.tschoe/posts/10214240902936276     

2021.01.28._《성취예측모형》은 어디서 온 물건인가

https://www.facebook.com/dongseok.tschoe/posts/10214254016504107     

2021.01.30._《성취예측모형》에서 인간과 환경조건의 문제

https://www.facebook.com/dongseok.tschoe/posts/10214267588963410     

2021.01.31._정치인 이낙연과 《성취예측모형》의 타당성과 신뢰성에 대하여

https://www.facebook.com/dongseok.tschoe/posts/10214273530871954     


이제부터는 《성취예측모형》의 전모(全貌)를 조금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써볼 예정이다. 사람을 진단하는 것이라, 마치 의사가 환자의 건강이나 질병을 진단하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의 사회적 성취를 이루어낼 것인지를 사전에 진단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고위공직자, 즉 일꾼을 뽑을 때, 그 쓸모에 따라 보는 게 아니라, 신언서판(身言書判)과 같은 전근대적인 또는 비과학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본다.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외모, 언변, 글씨, 판단력으로 평가해왔다. 사실 요즘도 언론과 평론가들 대부분이 그렇게 한다.     


이런 무식한 기준으로 사람을 진단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잘못된 일꾼을 뽑는 경우가 빈번하다. 우리는 정치인 선출과 인재선발에 거듭거듭 실패해왔다. 신언서판, 사주팔자, 관상, 지연, 혈연, 학연 등의 기준은 무당이나 돌팔이들이 쓰는 진단법만큼이나 예측력이 없다.      


이런 몰상식한 민간요법으로 배우자나 연인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자유겠지만, 고위공직 후보자들에 대한 진단은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좀 더 과학적인 방식의 진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성취예측모형》이다. 이 진단방법은 예측력이 높다. 왜 그런지를 이제부터 설명하겠다.     


▶ 인간이 개인적 또는 사회적 성취를 이룩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모든 인간은 욕망을 갖는다. 사람마다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 욕망이 실현되는 방식도 사람마다 다르다. 여기서 욕망의 크기와 방향을 구분하고 이것을 역량수준과 비교·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욕망이 역량수준을 넘어서면 탐욕이 된다. 《성취예측모형》은 욕망의 크기와 역량수준을 비교하여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탐욕의 상태로 나아가지 않도록 한다.     

 

욕망의 방향도 마찬가지로 사적 욕망의 크기와 공적 욕망의 크기를 비교·검토하여 어느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삶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돕는 것도 《성취예측모형》이다.      


모든 인간은 공적 욕망과 사적 욕망이라는 두 가지 방향의 욕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 두 방향이 두부모 자르듯 나뉘는 것은 아니고 마구 뒤섞여 있지만, 그 방향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스스로 인식할 수 있다. 공적 욕망은 현실의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시스템을 새롭게 개선하려는 욕망이고, 사적 욕망은 부와 명예 등 개인적 출세와 관련되어 있다. 어떤 욕망이든 뭔가를 성취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욕망이다. 누구에게나 욕망이 있지만, 욕망만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어떤 욕망이든, 욕망이 실현되려면 자신의 타고난 성향, 즉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만약 사회적으로 성취하고 싶은 강렬한 공적 욕망, 즉 사회적 불공정, 부정부패, 부조리한 것들을 개혁해보겠다는 욕망이 역량수준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사회적 성취는 가능할 것이다. 사적 욕망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하듯이, 욕망이 성취되는 경우란 매우 드물다. 왜냐? 환경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조건을 극복하는 사람들은 욕망을 충족하지만, 대부분은 환경조건을 극복할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아 욕망을 실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욕망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불행해지지 않는다. 욕망이 좌절된 이유를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여 욕망의 크기와 방향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역량수준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욕망으로 확대시키는 경우도 있다. 자기계발서 수준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탐욕의 상태로 나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또한 역량수준과 상관없이 욕망의 방향이 잘못되어 탐욕이 드러나 결국에는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경우도 있다. 이전 글에서 강조했던 욕망, 역량, 탐욕의 삼각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 사실발견(fact finding)은 인류문명의 출발점이다.     


이전 글에서도 몇 차례 언급했지만, 욕망을 실현해줄 역량군은 다음과 같은 세 종류가 있다. 인간은 이 세 종류의 타고난 성향(역량)에 의해 욕망을 실현하게 한다. 즉 성취의 가능성은 이 세 가지 역량군에 달려 있다.   

  

⚊ 도구적 역량군(사실발견, fact finding)

⚊ 추상화 역량군(자기인식, self-awareness)

⚊ 목적지향적 역량군(열린 지평, open horizon)     


도구적 역량군은 사물이나 현상의 구조를 이해하고 핵심을 파악하여 특정한 현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능력을 말한다. 추상화 역량군은 도구적 역량군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결정하고 그 도구들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도구들을 적절한 용도로 잘 사용하더라도 욕망이 성취될 때까지 끈질기게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목적지향적 역량군이라고 부른다.     


이 세 종류의 역량군 중에서 이번 글은 도구적 역량군의 의미만을 살펴보고 다음번 글에서는 추상화 역량군을 다룰 예정이다.     


《성취예측모형》은 도구적 역량군에서 시작한다. 욕망을 실현하려면 우선 좋은 도구상자(toolbox)를 가지고 태어났어야 한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인간, 조직, 세계를 분석하고 개념화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 개념들을 민감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도구상자란 바로 사고력, 즉 생각하는 힘이다. 생각하는 힘도 타고 난 성향이기 때문에 교육기관은 이런 성향이 스스로 발현되도록 교육환경조건을 잘 정비해주어야 한다.     


사고력의 핵심은 사실을 발견하는 것(fact finding이다. 인간은 인간 자신과 자연, 그리고 세계에 관한 무수한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이론을 구성하고 발전시켰다. 이것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이다. 다른 종들은 호모 사피엔스를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었다. 호모 사피엔스만이 자신들의 문명을 여기까지 발전시켜왔다. 그러므로 문명(civilization)이란 인류가 발견하고 발명하여 발전시켜온 모든 지식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문명을 발전시키는 사고력의 핵심은 사실발견(fact finding)이다. 사실의 정확성 확인(factual accuracy confirmation)이나 사실적 이해(factual understanding)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이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사실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바로 인류문명을 발전시키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개념과 이론은 사실에 근거했을 때에만 문명을 발전시킬 힘을 갖는다.

     

사실발견의 노력은커녕 최소한의 사실여부 확인조차 없이 그저 믿어버리거나 믿게 하려는 경우, 사이비신흥종교나 전광훈류의 탐욕적 샤머니즘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류문명은 이런 사실발견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생각없음(thoughtlessness)’에 의해 후퇴한다.      


전광훈 목사류의 샤머니즘 수준은 아니더라도 개인적 이익이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반지성적(anti-intellectual)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우리 사회에 특히 많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언론사 종업원들이 사실발견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을 발견하여 보도한다면 굳이 일반인은 그냥 보도내용만 읽어도 될 일이다.      


직장인들의 일상은 늘 바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의 사실을 발견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언론이 필요한 것인데, 우리나라엔 이 언론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언론사 종업원들이 거의 ‘생각없음’의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언론신뢰도가 세계 최악의 상태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들이 왜 ‘생각없음’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느냐의 이슈는 나중에 깊이 다루기로 하자.     


사실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고위공직자일수록 중요하다. 사실발견도 없이 남들이 하는 말에 의지하여 중요한 결정을 하거나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한다면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우리 정치판은 왜 개판인가?     


욕망이 역량을 넘어 탐욕으로 변질되면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경우도 있지만, 욕망의 방향과 역량수준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에도 사회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인적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을 공적 영역에서 실현하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 사적인 욕망과 공적인 욕망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불상사다.      


예를 들면, 안철수, 나경원, 김종인, 유승민, 주호영, 이낙연, 김진표, 전해철, 박병석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수많은 정치인들을 잘 살펴보라. 이들은 왜 정치를 하고 있을까? 이명박과 박근혜는 왜 정치를 했을까? 잘 생각해보라.     


나는 이 사람들이 사회적 불의, 불공정, 부정부패, 범죄행위 등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윤석열의 선택적 수사와 기소에 대해서는 전혀 분노하지 않는다. 사법농단에 연루된 66명의 판사들에 대해서도 무념무상의 상태에 있다. 극심한 양극화에 따른 중산층의 몰락, 세계 최고수준의 산재사망률을 나타내는 열악한 노동환경, 자살에 이르는 빈곤층의 궁핍한 삶에 대한 애끓는 심정은커녕 측은지심조차 없다. 선거철이 되면 거리에 나가 오뎅이나 핫도그 사 먹는 쌩쑈를 할지언정 말이다.      


이들은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선호한다. 해체되어야 할 mofia의 생각과 똑같다. 해방 후 지금까지 그래 왔다. 이들의 정책이 오늘날의 양극화를 만들어왔다. 특히 상위 1%의 리치 그룹(rich group)이나 최상위 0.1%의 슈퍼리치그룹(super-rich group)을 공적 영역이 보살펴주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기득권층의 부자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어떻게 해서라도 실현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법조카르텔을 끼고 불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을 국가정책으로 배려해줄 필요는 없다.     


지금 우리 정치판의 다선의원들과 고위공직자그룹의 대부분은 놀랍게도 사회적 불의와 부정부패엔 눈을 감는다. 살인적인 궁핍 속에 살아야 하는 빈곤층도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사회구조와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국가의 운명이 중산층에 달려있는데도 말이다. 이들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메시지를 보면, 이 사람들이 평소에 어떤 사안에 관심을 쓰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들은 사회구조와 시스템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이렇게 사적 욕망에 불타는 사람들은 공적 영역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들은 안타깝게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셈이다.     


▶ 윤석열과 한동훈의 경우     


이동재, 한동훈, 윤석열이 공모하여 유시민을 엮어 넣으려고 했던 검언유착 사건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한동훈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딱 잡아뗐다. 그런데, 제보자 X의 활약으로 검언유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한동훈과 윤석열은 수백 건의 문자메시지와 수천 번의 통화건수가 있었음이 드러났고, 심지어 한동훈은 윤석열의 처 김건희 휴대폰과도 연락을 주고받았음이 밝혀졌다. 문제는 무슨 내용을 주고받았는지 그 증거를 밝히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한동훈이 휴대폰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이 없다면서 왜 그러나? 그 이유를 설명해야 될 것 아닌가?     


한동훈은 개인회사의 직원이 아니다. 그는 고위공직자인 검사다. 공직자의 모든 직업적 행위는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한동훈이 윤석열과 통화한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공직자로서 직무상 불법성이 있었다는 점을 명백히 드러내는 행위다. 한동훈의 말대로 어떤 잘못도 없었다면 비밀번호를 알려주면 된다. 숨기는 것은 범죄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다. 이것을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합리적 의심이라고 하는 데, 의심이 아니라 당연한 추론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공리(公理, axiom)는 증명이 필요 없는 추론적 사고의 결과다.      


법률가들이 본인의 범죄행위와 관련된 증거를 인멸하거나 조작하거나 또는 숨기는 것은 처벌할 수 없다는 법리적 해석을 하는 모양이다. 사생활로서의 개인적 범죄행위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공생활은 사생활과 다르다. 그 휴대폰에서 주고받은 모든 메시지는 시민들의 세금에 의존하여 그런 활동을 한 것이므로 사생활이 아니다. 그는 공직자로서 반드시 휴대폰 비밀번호를 제출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강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동훈이 유리할 때는 검사로서의 특권은 다 누리면서 불리할 때는 개인적인 사생활로 변신하도록 허용하는 행위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공직자에게 이런 행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공생활과 관련된 것은 필요할 때 모든 것을 투명하게 내놓아야 한다. 한동훈의 사생활을 보호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수천 건의 통화와 문자들은 사생활이 아니라 공무수행과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라임사태에서 김봉현의 접대를 받은 검사들이 다 같이 동시에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부부싸움 때문이었다는 등 갖가지 이유를 댔다. 이들이 시민에 대한 배신자들이며 동시에 범죄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명백한 추론적 공리(公理)다.     


▶ 이낙연과 소위 중진이라고 자처하는 다선 의원들의 경우, 그리고 공소시효 문제     


이런 어처구니없는 검사들의 행태에 근거하여 판단한다면, 검찰조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범죄집단’이다. 이 범죄집단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유일한 권능은 입법기능을 가진 국회에 있다. 180석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런데 국회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이낙연 때문이다. 이낙연의 시야는 개인적 출세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잘못된 사회구조와 시스템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낙연은 저 위험한 범죄집단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열린공감TV>에서 방영된 〈거대한 악의 카르텔, 옵티머스 스캔들〉을 보면, 이낙연의 이름이 여러 차례 거명되고 있다. 이 스캔들을 덮어버린 주체가 바로 윤석열 검찰이다. 이런 거대한 악의 세력이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다는 사실이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난 것이다. 강진구 기자가 이런 정도의 탐사취재를 했으면 사회정의를 위해 존재하는 검찰은 모든 가용자원을 동원해서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어야 한다. 하지만 전혀 관심조차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검찰이 아니라 그들과 한 통속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법이 미비하다면 국회는 재빨리 <한동훈법>을 만들어야 한다. 윤석열과 한동훈이 저지르고 있는 선택적 정의는 그 자체로서 불의며 사회적 탄핵의 대상이다. 이런 자들을 혹독하게 처벌하지 않는다면 누굴 처벌해야 하는가?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한명숙 사건도 똑같다. 철저하게 재수사하여 당시 관련된 모든 검사들은 지위를 막론하고 엄격하게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공직자의 비리, 부정부패, 직권남용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일반인의 두 배로 늘리거나 아예 없애야 한다. 공직자의 행위는 그 자체가 국가권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회의 저 다선의원들이 이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한동훈 사건만 보더라도 우리 정치판이 얼마나 개판인지 알 수 있다.      


윤석열이든, 한동훈이든, 이낙연이든, 박병석이든 사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공적 영역에 들어왔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빠른 시일 내에 사적 영역으로 나가는 것이 본인들과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 윤석열과 한동훈의 행태가 반사회적이고 반문명적인 이유     


윤석열과 한동훈처럼, 그리고 앞서 예로 든 정치판의 인물들처럼 공직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은 인물이 많다.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성취예측모형》에 따른 대강의 분석만으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성취예측모형》은 자신의 욕망과 역량을 비교할 수 있는 반성과 성찰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성취예측모형》의 출발점은 사실발견(fact finding)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사실발견은 문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윤석열과 한동훈은 사실발견(fact finding)을 방해해왔다. 따라서 인류문명의 발전을 저해하는 반사회적 반문명적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반문명적 인간들을 그냥 두고 보는 정치권의 인사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은 고위공직에 부합하지 않는다. 현재는 법규가 미비하여 이런 자들을 고위공직에 내쫓지 못하고 있는데, 이들을 내쫓을 수 있는 방법은 입법을 통해 스스로 퇴출되도록 하는 길밖에 없다. 이것은 또다시 계몽된 시민, 깨어있는 시민들의 몫이다. 차기 헌법개정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의 길을 터야 할 것이다. 이 얘기는 또 나중에 하자.     


점점 길어진다. 오늘은 여기까지. 《성취예측모형》은 사실발견(fact finding)의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만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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