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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Dec 02. 2015

제2강 새로운 경영론_질문과 답변

인간의 실존적 평등과 기능적 불평등을 조화시키려면

제2강 새로운 경영론_질문과 답변

인간의 실존적 평등과 기능적 불평등을 조화시키려면


이 글은 (사)마포공동체라디오(마포FM)에서 진행하는 “사회적기업(협동조합)을 위한 새로운 경영론 - 게르만 모델의 경쟁력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주제의 5회 시리즈 강연 중에서 2015-11-26에 있었던 제2강을 듣고 수강자들이 사후에 서면으로 질문(소감 포함)한 내용에 대한 답변의 일부입니다. 함께 나눌 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이곳에 공유합니다.


1.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을 하며 칼을 예로 들었다 하셨죠. 사람이 만드는 물건은 물론 기획이 먼저일 텐데, 사람이 만들지 않은 자연물, 일테면 구름이나 돌은 다르지 않을까요?

- 사르트르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말은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 결국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과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 제1원칙입니다. ... 인간은 우선적으로 미래를 향해서 스스로를 던지는 존재요, 미래 속에 스스로를 기투(企投)하는 일을 의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끼나 부패물 또는 꽃양배추가 아닙니다. 인간은 우선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기투(企投, project)인 것입니다. 이 기투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하늘에도 또한  아무것도 없습니다. ... 이리하여 실존주의의 첫걸음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금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8, 33~35쪽)     


- 이 문맥에서 가장 어려운 용어가 기투(企投, project)인데, 이것을 옮긴이 박정태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어떤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 즉 피투(被投)된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은 본래적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본질도 없는 부조리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렇게 피투된 존재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이 책의 44쪽) 받은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자신이 절대적인 자유로서,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에 직면하여 스스로 선택하고 기투하는(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처럼 인간이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짐으로써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을 기투라고 한다.”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8, 124~125쪽)     


- 실존주의 사상과 철학에 대해서는 많은 문헌들이 나와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 견해 중에서도 실존철학은, 인간이 이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상징하면서 특정한 의미, 목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독특한 존재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인간 존재가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과 실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사유 세계를 인류에게 선사하고 있습니다.    


- 20세기 들어서면서 두 차례나 커다란 전쟁을 경험한 유럽의 지성인들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를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와 본질에 대해 고민했고 그런 깊은 사유와 성찰을 통해 인간을 실존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위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이끌었습니다.      


- 그리하여 오늘날 모든 지성인들은 인간의 존엄성은 주어진 것으로,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성역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인문학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회과학은 이 인간존중의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식 경영학은 인간을 자원화 또는 도구화함으로써 경영실무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습니다.   


- 아울러, 실존주의자로서 살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좋은 다음의 참고문헌을 소개합니다. 게리 콕스,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 지여울 옮김, 황소걸음 2012            



2. “인간존중, 실존주의 철학, 생산성과 행복, 플랫폼을 만들자.” 제가 속한 조직은 처음에 인간존중의 사상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성과와 경쟁, 관리가 도입되어 그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나라 사회에서 인간존중의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지?

-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인간존중의 개념이 뿌리 깊이 박혀 있지 않기 때문에 조직 구성원들이 서로 인간을 존중하도록 구속하는 제도적 장치들을 조직운영 플랫폼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플랫폼이 굳건하게 만들어지고 그것이 잘 지켜져서 조직문화로 승화되도록 하려면 역할이 큰 구성원들의 섬세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 이렇게 되지 않으면, 인간존중의 개념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큼이나 위태롭기 때문에 인간의 도덕성이 무너지고 순식간에 억압과 착취의 조직문화로 돌변하고 맙니다.     


- 우리 사회에서 인간존중의 플랫폼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군사독재 시절을 종식시켰듯이 인간이 만든 좋지 않은 문화를 바람직한 문화로 만드는 것은  구성원들의 노력과 성숙된 시민의식에 달려 있습니다.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건전한 시민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교육훈련에도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이 세계는 서로 얽혀있으며 한 사람의 지도력(리더십)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학습의 기회를 자주 만들어서 서로 연대하면서 인간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3.
① Human Respect Management에서 Management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 인간존중은 manageable한 것일까요? (일반적 경영의 의미에서) => 자아실현을 위한 플랫폼 구축 <= 공동의사결정 <= 수평적 조직(?)

② 첫 시간에 기업운영모델은 국가운영모델을 닮아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교육부가 한때 교육인적자원부였던 것이 생각납니다.

③ 결국 국가든 기업이든 "노동의 인간화", "조직의 수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해야 하며 이에 기반한 플랫폼을 만들기 위해서 리더의 역할이 절대적이지 않을까요?  또다시 결론은 "다음 세대", "교육", "협동조합 정신"인가요?

- 서유럽 또는 북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이미 70년대에 노동의 인간화와 조직의 수평화를 위해 노력해왔으나, 우리 사회는 그런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한 명령과 통제, 지시와 복종, 억압과 착취의 사회적 플랫폼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그 후유증이 아직 크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정신적 토대가 아직은 미성숙한 상태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강의시간에 잠시 언급했던 실존주의 사상은 사르트르에게서 툭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 등과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의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실존사상은 매우  오랜동안 인간의 본질과 존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결과였다는 말입니다.    


- 이에 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에서는 유럽의 지성계와 같은 인간의 본질과 존재에 대한 끈덕진 사유의 노력이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7세기 신라시대의 원효대사가 주장했던 일심사상(一心思想)이나 19세기의 동학사상은, 서양의 17세기 데카르트나 19세기 쇼펜하우어 등의 사상과 유사했지만, 불행하게도 후학들에 의해 그 사유의 깊이와 폭을 넓히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시대마다 뛰어난 사상가와 학자들이 나타났지만, 그것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 어째서 이런 현상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일까? ‘나’(Ich/I, Selbst/self)는 누구인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2015-12-3(목), 제3강에서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4. 어렵습니다. 꽉 막힌 공무원 조직에서 노동의 인간화, 조직의 수평화를 시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 네, 그렇습니다. 어떤 누구도 공직사회를 개혁하려고 할 때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공무원 사회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나라나 비슷합니다. 관료사회의 특징을 어디나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관료사회는 그 정도가 심한 편입니다. 영혼이 없는 관료들의 행태에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 우리나라의 공직사회에서 노동의 인간화와 구조의 수평화를 이루는 것은,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아주 요원한 일입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공직사회의 변화를 위한 전략은 의사결정과정에서 투명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도 역시 구성원들의 시민의식이 향상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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