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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May 04. 2022

여름이 오기 전에 무량사 템플스테이 첫째 날

220424

템플스테이를 가기로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일터에서 큰 행사를 연달아 세 개를 마무리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도 있었다. 혼자서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떠올랐던 키워드는 두 개였다. 바다와 절. 동해 바다를 볼 수 있는 낙산사는 5월까지 꽉 차있었다. 아마 갔어도 사람이 많아서 번잡했을 것이다. 절이냐 바다냐. 게스트하우스는 항상 재밌을 것 같다가도, 막상 혼자 떠날 생각하면 예기치 못할 혼잡함에 머뭇거리게 된다.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서울에서 크게 멀지 않은 사찰을 찾았다. 무량사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양도 없고 헤아림도 없다는 "무량"이라는 뜻풀이가 마음에 들었다.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씻고 대충 세면도구와 책 몇 권만 채워 넣은 채로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10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는 요아소비의 <밤을 달리다>를 2시간 내내 들었다. 쉼 없이 이어지는 건반의 음 하나하나가 마음에 드는 노래다. 복도 건너편 좌석에는 스님이 앉으셨다. 버스 안에서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셨는데 저 자세가 정말 편안해서 하시는 걸까 싶었다. 혹시 무량사 스님인가 했는데, 정안에서 내리셨다. 세상은 넓고 스님은 많다. 청양 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2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청양 읍내 메인 도로. 가로등에 새빨간 고추가 누워 있다.
청양 읍내에서 외산면으로 가는 버스
외산으로 가는 버스 안. 나와 할머니 한 분만 버스를 채웠다.

처음 시내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네이버 지도에서 알려준 800번 버스가 없어서 당황했다. 시간표에 나와 있는 건 이름 모를 지명 "방면"으로 가는 버스들 투성이었다. 정류장 근처에 서 계시던 버스 기사님에게 여쭈어보니 15분 뒤에 무량사 방면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타지에서 헤맬 때는 핸드폰을 들여다볼게 아니라 믿음직한 현지인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다. 뭐 모두가 친절한 건 아니지만.


시간을 맞춰 외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혹시 몰라 기사님께 확인을 하고,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는 확답도 받았다. 맨 뒷 좌석에 앉았다. 양쪽의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면서 시골길을 달렸다. 안경이 걸리적거려 벗었다. 가끔씩 눈도 감았다.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었다. 바람이 소똥 냄새를 싣고 왔다.


외산면사무소에 도착했을 땐 시계가 1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몹시 허기져서 바로 보이는 중국집에 들어가서 앉으려 했더니, 손님이 많아서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다고 아주머니께서 양해를 구하셨다. 짜장면이 참 먹고 싶었는데. 그래도 돌이켜보니 말씀해주셔서 감사했다. 그래, 갈수록 짜장면은 소화도 잘 안되더라. 점심은 무량사 앞에 있는 광명식당이라는 곳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하늘이 맑았다. 무량사 가는 길은 정겹고 좋았다.


마을에 있는 비석 아래에 쓰인 글이 눈길을 끌었다. 같은 일을 해도 마음가짐에 따라 본인의 감정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점. 일체유심조다. 아직 절도 아닌데.

무량사에 도착하기 전부터 난 이미 외산이라는 동네에 마음을 빼앗겼다. 모든 것이 느렸다. 구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하늘에 햇빛이 나뭇잎을 연두색으로 물들였다. 무엇보다 사람이 없었다. 말소리, 광고, 자동차 배기음으로 가득 찼던 귀를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랫소리가 채웠다. 배가 더 이상 견디기 힘들게 고파질 때쯤 식당에 도착했다.


신선한 나물 가득한 비빔밥과 머리털 나고 가장 맛있었던 도토리묵
식당 앞을 지키고 있던 강아지

식사를 마치고 조금 걸으니 무량사 입구가 보였다. 매표소에 계신 할아버지께 템플스테이를 왔다고 하니 올라가서 종무소를 찾으라고 말씀해주셨다. 시선은 나를 향하는 듯했지만 동시에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그렇단다.

첫 번째 문을 통과하고 나서 왼쪽에 자그만 다리가 보였다. 다리를 건너고 조그만 경사를 오르면 천왕문이라는 곳에 당도하는데, 이 문을 지키는 험상궂게 생긴 네 명의 천왕을 지나면 드디어 무량사에 도착하게 된다.



극락전에 한 눈을 팔다가 절을 한 바퀴 다 돌고서야 입구 바로 왼쪽에 있는 종무소를 찾을 수 있었다. 직원 분께서 무척이나 친절하셨다. 안 그래도 조금 더 기다렸다 안 오시면 전화하려 했다고 하시면서, 숙소로 가는 길에 저녁 공양 시간과 생활 수칙을 알려주셨다. 숙소 앞에서 이불보, 베개피, 법복을 건네주시고는 생긋 웃으시고 다시 종무소로 돌아가셨다. 일요일 숙박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어 혼자 적묵당이라는 숙소를 쓰게 되었다. 고요하고() 잠잠한(默) 사랑채(堂)라는 뜻이었다. 배정된 방 안에는 조그만 매트리스와 이불 그리고 책상이 있었다.


방에서 보이는 풍경과 법복룩.

법복은 언제나 입어도 기분이 좋다. 특유의 먹색과 손에 느껴지는 질감 그리고 무엇보다 편안한 착용감까지, 집에 훔쳐가고 싶을 정도다. 매트리스에 이불보를 끼우고 베개피를 베개에 씌웠다. 잠시 누워봤다. 집에 온 것 마냥 편안했다. 누워 있다가는 아무래도 잘 게 불 보듯 뻔해서 일단 짐을 간단히 정리하고 방을 나왔다. 우선 절부터 살펴보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전에 기도를 올렸다는 태조암까지 걸어갈 심산이었다.


절 가장 뒤편에 있던 삼성각
삼성각 앞에 졸졸 흐르는 시냇물
무량사의 표지 모델, 극락전
5층 석탑과 석등. 국사학과 친구에게 사진을 보내줬더니 바로 절 이름을 맞추더라.

태조암까지는 1km가 조금 되지 않는 거리였다. 서두를 것 없이 가장 느린 속도로 걸었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과 햇빛에 비친 자연이 이루는 조화가 아름다웠다. 조금 더워지는 것 같으면 바람이 불어와 땀을 말려주었다. 무릉도원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절 입구에 있는 극락교. 건너서 왼쪽으로 꺾으면 태조암으로 가는 길이다.
봄에도 가을의 색을 띠고 있는 나무들. 매번 이름을 궁금해만 한다.
가지의 곡선과 피어나는 이파리들
나무의 행렬을 지나 도착한 태조암
하얀 목련 향이 진동했다.

암자에 반쯤 누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발소리가 들려 몸을 일으켰다. 스님이었다. 황급히 엉거주춤 일어서서 어설프게 합장을 했다. 우리는 기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처마 아래 앉았다. 침묵이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스님이었다.


"템플스테이는 처음이에요?"

"아뇨. 세 번째입니다."

"오 어디 어디 갔다 왔어요?"

"석종사랑 관문사 다녀왔습니다."

"충주 석종사! 거긴 어떻던가요?"

"좋았어요 묵언수행하는 일반인 분들도 많으시고 신기하더라고요. 근데 무량사는 여기 태조암까지 산책로가 있는 게 큰 거 같아요. 날도 너무 좋고."

"그렇죠 거긴 법당이 크게 있어서 수행하시는 분들이 꽤 있으시죠. 왜 혼자 오셨어요 젊은 분이."


이런 식으로 말이 오갔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스님들은 대부분 쾌활하시다. 별 것 아닌 것에도 쉽게 웃으시고 웃음이 맑다. 발성도 시원시원하시고 심지어 이 스님은 키도 크셔서 걸음걸이나 움직임이 전반적으로 큼지막하셨다. 항상 궁금했던 것도 여쭤봤다. 염불도 따로 배우는 게 맞으며, 발성 연습을 따로 하진 않으시는 것이었다! 어떤 걸 좋아하냐고 물어보시길래 운동은 다 좋아한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래서 몸이 좋은 거였다고 웃으셨다. 조금 얘기 나누시고는 듬직해 보인다고 출가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셨다. 아무래도 칭찬은 출가 영업을 위한 빌드업이 아니었나 싶었지만, 스님에게 듣는 칭찬은 괜히 더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짧게라도 출가해보는 걸 추천하시는데, 1년 휴직하고 출가할 수는 없나 하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가끔씩 속세와 떨어져 구도를 해보는 걸 진지하게 고민하고는 한다. 스님이 "뭔갈 할 때 아 이거 좀 느리다 싶잖아요? 그럼 더 느리게 해도 돼요."라고 말하시면서 단전에서 올라오는 호흡으로 호탕하게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평화로운 대화였다. 공식 일정이 아니라 우연히 벌어진 대화라 더 멋스러웠다.


스님은 법복을 여미시며 일어나 더 있다가 갈 건지를 물어보셨다. 그러겠다고 했다. 스님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져갔다. 강아지 한 마리가 스님 뒤를 따랐다. 무량사에서 함께 온 친구였다. 겁이 많아서 스님과 나올 때만 태조암까지 올 수 있다나. 시야에서 한 사람과 강아지가 조금씩 사라져갔다. 회자정리.


다시 돌아가는 길에서는 사람도 강아지도 만나지 않았다. 푸르름의 향연 그 자체였다.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없었다.
천왕문에서 극락전으로 이어지는 돌길
적묵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을 감고 있는 강아지를 발견했다.


방에 돌아왔을 때 피곤함이 몰려왔다. 간단히 세수만 하고 몸을 눕혔다. 저녁 공양까지는 30분, 낮잠 자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다가 서서히 잠에 들었다.


알람이 울렸다.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이것보다 더 잘 잘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렵사리 몸을 일으켰다. 눈을 비비면서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 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었다. 핸드폰은 이제 내일까지 가방에 고이 잠에 들 예정이다.


저녁 공양 시간은 5시 10분이었다. 공양간은 숙소에서 50걸음 정도 걸렸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앞치마를 두르고 계신 보살님과 종무소 직원 분께서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사실 "보살"이라는 단어가 내게도 아직 익숙지는 않은데, 사용되는 맥락을 보아하니 아마도 기독교의 "집사"에 상응하는 일반적인 호칭인 듯했다. 좌측에는 주방과 배식대가, 우측에는 식사 공간이었는데 테이블이 8개 정도 직사각형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적어도 70명은 수용할 것 같은 공간이었다. 음식을 준비해주신 것 같은 보살님께서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시며 환영한다고, 차린 건 없지만 맘껏 드시라고 배식대를 가리키셨다. 작지 않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커다랗지만 따뜻한 목소리였다. 메뉴는 어느 정도 기대하긴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반찬이 모두 푸르렀다. 보살님께서는 제철인 두릅, 깨가 올려진 참나물 심지어 고수까지 직접 키우셨다고 자랑을 잊지 않으셨다. 절을 둘러보고 산책을 하는데 적지 않은 에너지를 썼는지 막상 음식 앞에 앉으니 꽤 배가 고팠다. 감자전, 쑥전은 물론 표고보섯이 들어간 시래기국까지 남김없이 다 비우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서 6시에 있는 저녁 예불까지 책을 들고 절을 돌아다녔다. 어느 돌에 앉아서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했다. 관광객이 모두 사라진 사찰과 구름이 차오르는 하늘을 감상하다 보니 어느새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이는 목탁 소리와 함께 말이다. 절을 좋아하는 이유는 많지만 내게 목탁과 풍경 소리는 그중에서도 두드러지는 이유들이다. 특히 목탁 소리를 듣고 있자면 나태하고 혼탁했던 정신이 번쩍하고 깨어나는 느낌이다. 목탁이 자아내는 소리의 파동과 함께 아까 잠시 대화를 나눴던 스님의 목소리가 나지막하지만 분명하게 들려왔다. 불경에는 문외한이라 귀를 때려대는 스님의 음성 속에서 나무 아미타불 정도만 간신히 건져낼 수 있었다.


짧은 예불 뒤에 무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태조암으로 향하기로 했다. 무량사로 온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계획도 해두지 않았기에 매 순간 마음이 가는대로 할 수 있었다. 그래, 먹었으면 걸어야지. 이제 하늘은 온통 구름이 메우고 있었고 너머의 해도 점차 저물어가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찬란하게 빛나던 나뭇잎들은 모두 색이 바래져 있었다. 빛이 달라지면 인식되는 대상도 달라진다. 엄밀히 말하면 대상은 그대로이고 나의 인식만 달라지는 거겠지. 결론이 나지 않는 생각들에 둘러싸인 채로 산책이 끝이 났다.


숙소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8시가 다 되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몸에게 고생했다고 스스로 말하며 따뜻한 물로 몸을 녹였다. 화장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샤워기 물 세기나 온도도 적정했다. 생각해보면 지난번 석종사에서도 숙소가 비슷했다. 템플 스테이도 도시인이나 외국인을 고객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시설 현대화가 한 차례 있었던 것 같다. 이 사업도 누군가는 기안하고 입찰을 통해서 공사가 이루어졌을테지. 집에서 가져온 스킨과 로션까지 바르고 매트리스에 누웠을 때의 청명한 기분이 아직도 선명하다. 책을 간신히 들어보았다.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바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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