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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Apr 23. 2022

약속 없는 토요일을 어떻게 보내볼까 하다가

한강 러닝, 샌드위치와 와인, 에드워드 호퍼 그리고 <해변의 카프카>

간만에 브런치에 뭔가를 써보기로 했다.


2월에 팔을 다쳤다. 출근길에 일어난 자전거 낙상사고였다. 보통 찰과상으로 끝나곤 했는데 이번에는 뼈가 부러지는 천운이 있었다. 전완근 안에는 뼈 두 개가 있다. 요골과 척골이라는 녀석들인데 이 친구들이 주인이 가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20도 정도 꺾여버린 거다. 과속, 마모된 뒷바퀴, 미끄러운 바닥의 합주이니 전적으로 나의 부주의 탓인 셈이다. 그러게 왜 위켄드는 <Sacrifce> 같은 좋은 노래를 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 리스너가 출근길에 신나게 페달을 밟아대다 자기 팔을 sacrifice하게 하는지. 다행히 수술도, 재활도 잘 마쳐서 이제는 팔이 붙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3달 남았다. 길다 길어. 여튼 아픈 팔은 키보드로 글을 쓰는 내게 쓰지 않을 아주 좋은 핑계가 되어줬다.


일을 할 정도로 팔이 괜찮아진게 한 달하고도 반이 되어가니 아픈 팔만이 이유는 아닐테다. 사실 더 큰 이유는 글쓰기를 무겁게 대하는 나의 태도 아닐까. 내가 뭐 대단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떠오르는 대로 쓰면 되는데 여전히 브런치의 새하얀 글쓰기 화면 앞에만 앉으면 뭔가 심오한 걸 내 안에서 끄집어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들고 만다. 방금도 <해변의 카프카>가 내게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개요를 20분 간 짜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주제를 틀었다. 강박을 다시금 인지한 기념으로 오늘은 일기장처럼 가볍게 써내려 가보려 한다.


함께 전날 밤 와인을 마신 친구를 쫓아내고 12시쯤에서야 와퍼와 청포도, 카라향을 먹었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청소기를 돌렸다. 설거지도 하고 쓰레기를 내놓고서는 마침 다 된 빨래를 널었다. 그때가 1시 37분쯤이었던가. 하루는 여전히 11시간이 남아있었고 내게는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집에 있으면 자게될 것 같아 일단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귀에는 에어팟을 꽂고 반팔, 반바지 차림에 소지품은 핸드폰과 마스크뿐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는 편이다. 시계, 반지, 심지어 오늘은 에어팟 케이스까지 굳이 필요 없다 싶으면 하지 않는다.


집에서 걸어서 1.5km 정도를 가면 한강 청담나들목이다. 일단 거기를 목표로 천천히 걷는다. 가는 길에 예전에 살았던 집과 다녔던 고등학교를 지나친다. 그때는 그렇게 주입식 교육과 경쟁을 견디는 게 힘이 들었는데, 지나고 봐도 그 시절은 미화가 되질 않는다. 파일을 압축하는 원리가 각 파일 간 유사한 점을 찾아 교집합을 하나로 압축하고 각 파일 별 고유한 값들만 저장하는 거라고 한다. 고등학교와 재수 때 나의 하루하루는 아주 지독하게 닮아 있어서 그 시절을 압축하고 나면 4년이 1달이 채 되지 않는 것만 같다. 주말이 되었다고 신나게 와인을 마시고 늦게 일어나 한강 산책 나가는 나의 지금이 새삼 행복하다는 걸 느낀다.


오늘은 구름이 적당히 껴있네

한강을 천천히 걷다 보니 뛰는 사람들이 꽤 지나간다. 문득 나도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먹은 와인이 아직 혈관 속을 여행 중인 거 같은데, 점심도 다 소화되지 않은 거 같은데, 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가뿐히 무시해버리고 몸을 푼다. 그리고 뛴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많이 뛸 생각은 아니었다. 가볍게 7~8km 정도를 생각했는데 날씨가 원흉이었다. 바람을 맞으면서 뛰는데 날아갈 것만 같아져서 오늘은 한 번 끝까지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3km를 돌파할 때쯤 지난번 최고기록이 16km이었으니 오늘은 반올림해서 20km라는 무모한 생각이 똬리를 틀었다.


결국 했다.

16km를 5'42''페이스로 마쳤었는데, 고작 4km 늘었다고 폼이 많이 떨어졌다. 돌아오는 길 잠수교에서 무릎에 통증이 느껴진 게 컸다. 그때쯤 멈췄으면 되었을걸,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한다고 스스로 다그치며 결국 끝까지 달려냈다. 몸이 험한 주인을 만나 고생이 많다. 집에 걸어 돌아오는 길이 정말 멀었다. 이마트24에서 산 포카리스웨트는 천상의 맛이었다.


10km 지점이었던 이촌 한강공원, 반포 한강공원의 멋스러운 나무들 그리고 청담나들목 한강 뷰


집에 돌아와서 시간을 들여 몸을 푼다. 따뜻한 물로 근육을 달래준다. 특히 무릎에 신경을 쓴다. 팔만 나으면 자전거를 타는 게 아무래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7시가 한참 지난 후에야 저녁을 먹어보겠다고 집을 나선다. 배달 음식에 대한 유혹이 오늘만큼 강했던 적도 없었는데 이것마저 이겨낸 걸 보면 앞으로 혼자서 배달 음식을 먹을 일은 없을 것 같다. 환경에도 정서에도 좋지 않다. 오늘 저녁은 근사한 걸 먹기로 한다. 매번 친구들과 함께 가던 집 근처 레스토랑을 혼자 간다. 책과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말이다.


예전에 살던 집 바로 앞에 있는 이 조그만 레스토랑은 내가 매우 아끼는 공간이다. 우선 처음 오는 사람이 찾기 어렵게 뒤편에 숨겨진 공간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여기가 맞나라는 생각에 고개를 기웃거리며 문을 열면 산뜻한 재즈가 들려온다. 데이브 브루벡을 사장님이 좋아하시는 듯하다. 올 때마다 <Take Five>를 한 번은 듣는다. 스탄 게츠의 <Corcovado>도 자주 출현한다. 무엇보다, 사장님께서 무척 차분하고 친절하시다. 손님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매번 온화하게 인사를 건네시고 따뜻한 음식을 테이블 위에 놓아주신다.


오늘은 뭘 먹어볼까. 온전히 나를 위해서 메뉴를 고를 수 있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함께 온 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메뉴판을 찬찬히 살폈다.


가장 애정하는 새우 아보카도 샌드위치 먼저. 사워크림, 올리브 오일, 레몬, 아보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매콤한 가루와 화이트 와인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두 번째 음식은 알리오 올리오에 문어로 정했다. 부드러운 문어살, 쫀득쫀득한 마늘과 무엇보다 완벽한 면발이 일품이었다.
음식과 화이트 와인을 끝내고는 랩탑과 노트를 펼친다. 오랜만에 레드 와인에 힘입어 글을 쓴다.

여기까지 쓰면 일기가 나의 현재에 다다른다. 그냥 끝내긴 아쉬우니 요즘 내가 꽂힌 그림과 구절을 간단히 소개하고 마쳐보려 한다. 마침 빌 에반스의 <Midnight Mood>가 흘러나온다.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처음 그림을 봤을 때는 두 남녀와 하얀 모자를 쓴 바텐더에 눈이 갔다. 늦은 시각 데이트를 마치고 바에 앉아 술을 기다리는 연인들, 그들을 위해 뭔가를 준비하는 바텐더. 두 연인의 손 끝이 살짝 닿고 있고 바텐더는 무슨 말을 하려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보면 볼수록 혼자 앉은 남자와 그림을 반으로 잘랐을 때 왼편에 느껴지는 깔끔한 공백감이 시선을 끈다. 그림의 왼편에서 오른쪽으로, 텅 빈 거리와 문을 닫은 상점 그리고  남자의 뒷모습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순수하게 외로우면서도 묘하게 위안이 되는 듯한 기분이다. 외로움이 뒤덮고 있는 밤 속에서 혼자 앉아 있는 저 남자는 그 무게를 온전히 견뎌내고 있는 것만 같다. 지구를 떠받치는 아틀라스 같다가도 자신의 고행이 반복될 것을 알면서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시지프스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그림을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갈수록 저 남자의 뒷모습이야말로 이 그림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앞서 얘기했던 <해변의 카프카>에서 가져온다.


"요컨대 사랑을 한다는 건 그런거야, 다무라 카프카 군. 숨이 멎을 만큼 황홀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네 몫이고, 깊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것도 네 몫이지. 넌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그것을 견뎌야만 해."


소설을 읽을 때마다 카프카 군과 내가 닮아 있다는 확신이 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소설에서 가장 기억이 나는 문장은 그가 한 말이 아닌, 오시마 씨의 말이다. 사랑은 행복하고 달콤한 것만 아니라, 사랑에는 사실 꽤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고, 마음이 생겨나고, 그 마음이 상대방에게 닿을 때까지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수백 번 오간다. 그 낙차를 온전히 견뎌내고, 사랑이라는 강렬함에 도취되지 않으며 상대방의 마음을 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그가 감정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깊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울 수 있는지 깨닫는다. 사랑으로 인한 황홀감이 깊을수록 그로 인한 괴로움도 무자비하게 증가한다. 무엇보다 어둠의 농도가 가장 짙을 때는 바로 상대를 잘 알지 못한 채 반해버렸을 때가 아닐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트는 바로 그때 말이다. 잠시 그때의 카프카가 되어서 쓴 짧은 시로 이 글을 끝낸다.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것>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상대에게 압도되어버린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초라해진다.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 사람과의 짧은 순간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해와 달이 되어 구름을 뚫고 나를 비춘다.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녀가 없는 모든 시간이 빛을 잃었다.

해와 달은 너무도 선명한 동시에 까마득히 멀다.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건 가슴 뛰는 일이다.

한 사람 생각에 잠이 들고 눈을 뜬다.

그녀를 만나기 오 분 전,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반한 나는 도저히 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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