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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May 04. 2022

여름이 오기 전에
무량사 템플스테이 둘째 날

220425

3시 55분에 눈을 떴다. 새벽 특유의 짙은 공기가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이 시간에 눈을 떠본 게 얼마만인가. 격렬히 저항하는 몸을 이끌고 침상을 벗어났다.


예불은 4시에 시작이었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텀블러에 담긴 물로 목을 축인 뒤 신발을 신었다. 적묵당에서 극락전까지는 200걸음이 채 되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회색 방석을 가져와 문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종소리가 새벽의 문을 열었다. 종의 둔탁한 진동이 나무 바닥에서도 느껴졌다. 종이 두 번쯤 울렸을 때였을까. 모래와 부딪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신발을 벗는 소리와 나무에 발이 일정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발자국은 나를 지나 극락전 중앙에서 멈췄다. 법복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어두컴컴한 새벽 안에서 무엇인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이 무엇인가가 주변의 공기를 본질적으로 변형해버릴 것을 안다. 목탁이 먼저였다. 새벽의 시간을 두 쪽으로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쳐왔다. 어느 순간부터 파도와 파도 사이에 스님의 육성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기대고 싶은 단단한 어깨와 같은 목소리였다.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온 소리는 나무의 날카로움과 뒤섞여 절묘한 균형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그 균형 속에 머물렀다. 마침내 평화였다.


모든 소리가 멈추고 스님의 발자국도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쯤 나는 눈을 떴다. 아무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잠시 잠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명상과 수면의 경계에 있는 어딘가에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다. 행복하다는 표현은 도저히 맞지 않는다. 평안했다. 온전해진 것만 같았다.


무량사의 새벽 전경
다홍빛 불상이 새어 나오던 새벽의 극락전


불당을 나와 극락전을 천천히 몇 바퀴 돌았다. 바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다시 가장 느린 걸음이었다. 


태조암까지 걷기로 했다.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했다.


회색 하늘 아래 산책길과 태조암


새벽 공기가 맑았다. 명상 덕분인지 오가는 길에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낭랑해진 기분이었다.


숙소에 돌아왔다. 문을 연 채로 누워 잿빛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다 <싯다르타>를 읽었다. 그러다 다시 하늘을 봤다.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7시가 다 되었을 때 밖으로 나왔다. 아침 공양 시간이었다.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초록이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식사를 끝냈을 때쯤 보살님께서 직접 만드신 쑥떡을 내어주셨다는 것이었다. 이제 다시 속세로 떠나갈 나를 위해서 언제든지 다시 오라며 하얀 봉지에 쑥떡을 고이 넣어주셨다. 봉지를 건네는 보살님의 표정이 비현실적으로 온화했다.


무량사를 떠나기 전까지 여태껏 했던 것들을 한 번씩 더했다. 태조암까지 걷고, 불당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가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고 책도 읽는 둥 마는 둥 했다. 더할 나위 없었다.


결국엔 집에 갈 시간이 다가왔다. 몸을 깨끗이 씻고 베개피와 이불보를 걷어냈다. 하루 동안 나와 함께 했던 법복도 가지런히 갰다. 적묵당 끝에 있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와 방도 한 번 쓸었다. 청소를 할 때면 마음도 같이 정리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더 정리할 마음이 남았나 싶다가도 기분이 더 산뜻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종무소에 들려 내 것이 아닌 것들을 돌려드렸다. 그냥 나서기가 못내 아쉬워 절을 한 바퀴만 더 돌아보기로 했다.


극락전 앞에 있는 나무
소리가 유독 맑았던 풍경
건너면 다시 속세
무량마을 앞을 흐르던 시냇물


이번 무량사에서의 이틀은 가장 만족스러운 템플스테이였다. 수없이 오간 태조암 산책길, 예정에 없었던 스님과의 대화 그리고 새벽의 예식까지. 앞으로 더 자주 다닐 것 같다. 갈수록 이 평안이 좋다. 머지않아 그리워질 것이다.


P.S.

닭다리 모양의 쑥떡. 쑥도 떡도 좋아하지 않는데, 쑥떡이 이렇게 맛있을 수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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