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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May 18. 2022

[팔 골절 일기] 수술날

220215

눈을 떴을 때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랑이라고 하긴 어렵다만 이미 수술을 해봐서 그 아픔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 아프겠지만 별일 없겠지. 빨리 수술이나 받았으면 좋겠다.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정생존자>를 병동 라운지 의자에 앉아 정신없이 보고 있었다. 참고로 시즌2까지만 재밌다. 2시 반쯤 전화가 울렸다. 곧 수술을 시작하니 병실로 돌아오라는 거였다.


날아다니는 양탄자 같은 바퀴 달린 침대에 올라 누웠을 때까지만 해도 꽤 여유로웠다. 이렇게 편하게 움직이는 건 침대를 낑낑 밀고 있는 간호사 선생님에게 농도 쳤다. 선생님은 내가 자신의 친구를 닮았다며 나이를 물어봤다. 자기랑 동갑이거나 한 살 많거나 할 거 같다나. 93이라고 말했더니 엄청 반가워하면서 자기도 그렇단다. 제가 사실은 빠른이어서 선생님의 "동갑이거나 한 살 많거나"가 무척 정확했다고 말했더니 크게 웃었다. "형님이셨네요." 나이가 딱 이 정도 농담거리로만 쓰이면 좋으련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내렸다. 동료에게 수술이 왜 이렇게 많냐고 투덜거리는 의료진에게 "고생이 많으시네요."를 건넸다. 일은 없을 때 없다가 몰려오는 건 병원도 마찬가진가보다. 그들이 보는 침대에 누운 나는, 내가 컴퓨터 화면에서 째려보는 업무 메일과도 같으려나.


5분 정도 기다렸다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공기가 으스스했다. 수술방의 낮은 온도는 세균을 죽이기 위해서라고 어디선가 읽은 적 있다. 양탄자에서 내려 수술 침대에 누웠다. 핑크색 이불과 함께 산소마스크가 내 입에 둘러졌다. 시야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의식이 흐려지는 거였다. 이 순간이 마지막일 거라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사람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소중한 사람들.


눈을 떴을 때 예감은 확실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음을 느꼈다. 거대한 나사가 살을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매일 이렇게 몸에 힘을 주면 헬스장 가지 않아도 몸이 만들어질 거다. 부르르 떨리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어떤 목소리가 몸에서 힘을 빼라고 했다. 수술이 잘 됐고 진통제가 들어가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통증과 통증 사이 찰나의 순간에 다음 찰나에는 아프지 않겠지 하고 생각했다. 틀렸다. 잠깐 의식에 희망이 차오르려면 어김없이 고통이 뺨을 때렸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상처 입은 짐승의 소리가 내 목구멍을 타고 나왔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까 힘을 빼라던 목소리는 이제 목으로 소리를 내지 말란다. 전신마취로 인해 기도가 상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게 좋다나 뭐라나. 순간적인 뜨거운 증오가 온몸에서 들끓어 목으로 나오려 했다. 나보고 도대체 어떡하란 말이냐 아파 죽겠는데,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참았다. 그 인내가 내게 어떤 신호가 되었다. 참을 수 있는 고통이다. 이성이 돌아왔다. 여전히 흔들리는 몸을 마음으로 부여잡았다.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입으로 크게 내뱉었다. 나사는 계속해서 팔을 쑤셔댔다. 호흡에만 집중하며 힘을 조금 빼보았다. 몸의 긴장이 아주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았다. 마침내 진통제의 파도가 고통의 모래에 닿은 듯했다. 희망으로 몸을 적시고 두려움에 맞섰다. 괜찮아질 거다,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수술방에서 나와 병실까지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를 실은 침대가 지탱하고 있는 바퀴가 지면의 아주 사소한 장애물과 마주했을 때도 신음이 기어코 목을 비집고 나왔다. 나르는 양탄자는 무슨. 일제와 독재 치하에서 고문을 견딘 이들을 생각했다. 유관순, 김근태는 이에 비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겠지. 감히 그 시대에 태어났으면 열사가 되었으리라 다짐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


자리에 돌아왔다. 간호사의 도움으로 팔을 최대한 편히 두고 핸드폰 거치 위치를 조정해 눈앞에 두었다. 온몸이 아리는 그 순간 <지정생존자>만이 내 구세주였다. 4개 에피소드가 지났을 때쯤 고통이 많이 가라앉았다.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드라마가 생겼다. 나중에 <지정생존자>를 떠올리면 팔을 수술했을 때가 기억이 나겠지. 추억 하나 생긴 셈 치자.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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