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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Aug 04. 2022

신을 믿는다는 것

자아로부터의 해방은 축복일까(220803)

친구 S를 오랜만에 만났다.


S는 군대에서 알게됐다. 일전에 화악산 꼭대기에 있었던 부대에서 송수관 동파로 12일 동안 머리를 못 감았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S는 그 시절을 함께 동거동락했던 친구다. 같은 팀에 같은 생활관이었으니, 동료이자 룸메이트로 군 생활 동안 가장 시간을 많이 보냈다. 내 기억 속 S는 세속적인 녀석이었다. 군대에서 남자들이 가장 관심 있는 주제가 뭐겠나. 단연코 여자다. 다들 휴가 갔을 때 자기가 처음 본 여자와 얼마나 짜릿한 시간을 보냈는지 자랑하기 바빴는데 S는 그 중에서도 고성과자였다. 유학파에 키도 크고 멀끔하게 생긴 데다 소년 같은 미소를 짓고 다녔으니, 모르긴 몰라도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S와 함께 밤을 누볐던 다른 부대원들도 S의 옴므파탈적인 면모를 간증하곤 했다. 그런 S에게 여자 다음 가는 관심사는 돈이었다. 미국 대학에서 금융을 전공한 S는 사회에서 헤지펀드에 들어가 천문학적인 부를 이루는 꿈을 얘기하곤 했다. 마치 그 시절 내가 <비포 선라이즈>가 얼마나 좋은 영화인지를 얼굴에 핏대 세워 얘기하고 다녔던 것처럼 그는 돈을 숭배하고 여자를 아낌없이 갈망했다.


제대 후 한동안 S와는 소식이 끊겼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학기를 마쳐야 했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웠다. 6년간 왕래 없이 지내다가 작년 말에 오래간만에 연락이 되는 군대 애들끼리 모이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때 오랜만에 봤다. 사실 그날도 신기했던 게 그렇게 놀기 좋아하던 놈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군대 애들은  꽤 거칠어서 진짜 안 마시냐고 밤새 엄청난 압박을 가했지만 S는 끝까지 웃으며 기독교 신앙을 이유로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그러다 몇 달 전 S의 생일이라 카톡하다 마침 집도 가까워서 한 번 보자, 하고 약속을 잡았는데 그게 오늘이었던 거다.




퇴근하고 만난 우리는 집 앞 레스토랑에서 필리치즈 샌드위치와 치즈 파스타를 시켰다. S는 남자 둘이서 오기엔 너무 예쁜 곳 아니냐며 멋쩍어했다. 나는 남자들이랑 안 오면 혼자 와야 된다고 좀 봐달라고 했다. 그러곤 30대 초반 남자들이 관심 있을 만한 연애, 일, 투자와 같은 주제들이 대화를 채웠다. 단 둘이 얘기하는 건 6년이 넘었을텐데 어색함은 하나도 없었다. 요즘엔 예전에 함께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어제 얘기했던 것처럼 친숙하다. 나만 이런건가. 뭐 어색한 게 있다면 밥상에 와인 한 잔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종교로 흘러갔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신실했다. 삶의 목표를 물었을 땐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답했다. 그가 작년에 2년을 넘게 사귄 여자친구와 이별했던 이유도 여자친구가 그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백신을 맞지 않았는데, 백신패스가 도입되면서 당장 갈 곳이 없어진 커플은 싸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자친구 입장이었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짧은 개발 기간으로 인한 백신의 부작용까지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백신을 맞지 않겠다는 합리적인 이유다. 그는 또 다른 이유로 짐승의 표(the mark of the beast)라는 생소한 개념을 얘기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짐승의 표는 "역사의 마지막이 되면 사람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로 물건을 매매하게 한다는 표"로서, 짐승의 표를 가진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된다고 한다. 기독교계의 특정 인사들에 따르면 백신에는 짐승의 표가 새겨진 나노 칩이 있어서 신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백신을 배격해야만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짐승의 표는 성경에서 아래 요한계시록 구절과 같은 맥락으로 쓰인다.


“첫째 천사가 가서 자기 병을 땅에 쏟아 부으매 짐승의 표를 가진 사람들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한 자들에게 악취가 나며 몹시 아픈 헌데가 생기더라.”(계 16:2)


마지막으로 얘기했을 땐 자기가 이번 휴가 때 얼마나 황홀한 밤을 보냈는지 묘사하던 친구였다. 그런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백신이 악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고 얘기하는 거였다. 아무리 모든 게 변한다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정반대로 변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솔직히 말했다. 전세계 모든 사람이 맞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백신이 음모론에 활용되기 좋은 소재라는 건 인정한다고. 하지만 "짐승의 표"나 "나노 칩"은 내 이해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 같다고. 표정을 보아하니 S도 내가 이해하길 기대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나도 모태신앙이다. 어머니께서 워낙 독실하셔서 고등학교 때까지는 매주 교회를 나갔다. S에게 모친의 신앙으로 인해 생겼던 어려운 일들이나 대학 시절 내 발로 교회를 찾아가 믿어보려고 했던 시절에 대해 얘기했다. 현재까지도 나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걸 주입된 믿음으로 인해 희미하게나마 인식하고 있는 정도지만 기독교로 인한 개인적인 시련 때문에 반감을 벗어던질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본인의 자유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속 편한 일인가.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나는 비로소 자아, 주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더 이상 삶의 이유를 찾아 헤멜 필요도,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슬퍼할 필요도 없다. 그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가 명한 대로 살뿐이다.


문득 그가 변한 계기가 궁금했다. 말로는 구독하는 기독교 유튜브를 열심히 보게 되면서 서서히 세상과 멀어졌다고 하지만 분명히 어떤 선명한 분기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4년 전, S의 형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조현병과 약물중독이 그를 죽음으로 인도했다. 어린 시절부터 S는 미국에서, 형은 캐나다에서 유학해서인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한다. 형의 사후에도 유지하던 S의 세속적인 삶에 마침표가 찍힌 건 2년 전이었다. 조금씩 신앙에 물들어 가던 그는 형이 지옥에 갔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음을 고백했다. 아무리 왕래가 적었다지만 친형이 스스로 삶을 저버렸다는 건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 될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다. 그가 견뎌내왔을 세월과 수많은 밤을 가득채웠을 고민들을 상상해보았다. 사는 게 이토록 쉽지 않구나. S에겐 의미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밤에 허우적이는 그에게 신은 마치 새하얀 등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는 진정으로 행복해 보였다. 지난 주말에도 교회를 두 탕 뛰었단다. 원래 다니던 방배동의 개척교회 예배가 끝나고는 인천에 있는 한 교회를 갔다는데, 거기서 성령 충만한 목사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았노라고 흥분해서 이야기하는 그를 나는 바라보았다. 어쩌면 눈앞의 한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종교는 그 역할을 다 하는 게 아닐까. 비록 나는 믿지 않지만 누군가가 신을 믿음으로 인해서 저토록 맑은 눈빛과 평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실 기독교가 사회가 마찰을 빚는 지점은 그들의 충만함이 본인을 흘러나와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지만, S 앞에 앉아 있는 그 순간만큼은 전도를 불편해하는 비신자보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S의 표정에 집중하고 싶었다. 안 본 사이에 얼굴이 많이 맑아졌다. 이젠 친구의 드라마틱한 변화가 그와 제법 어울렸다.


횡단보도에서 서로의 안녕을 빌며 헤어졌다. 그는 내가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고 했다. 멀어지는 그에게 나도 가뭄에 콩 나듯 너를 위해 기도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느껴지는 마음의 이물감은 마치 쓰지 않던 근육을 간만에 썼을 때의 불편함을 닮아 있었다. 그 이질감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말 나온 김에 간만에 신에게 인사드리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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