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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Aug 15. 2022

거침없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이유

220815

나는 나 자신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려 하는 편이다.


그래야만 스스로를 더 잘 알 수 있다고 믿어서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언어로 몸짓으로 끄집어낼 때, 그건 내 주변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성질이 변하거나 새로운 흥미를 파생한다. 가령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요즘 재즈싱잉 클래스를 듣고 있다고 한다. 듣고있던 친구가 갑작스레 재즈싱잉과 그냥 싱잉의 차이를 물어본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우리가 보통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는 음을 정해진 박에 들어가 정해진 길이로 부르지만 재즈싱잉은 정반대라고 설명한다. 오히려 악보대로 부르는 재즈는 재즈가 아니라고까지 한다. 그러다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에 재즈 싱잉에 대해서 더 찾아본다. 핸드폰으로 원하는 지식에 언제든지 도달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걸 감사하게 되는 지점이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친구는 흔히 사람들이 하는 보컬 트레이닝을 받아볼 생각은 없냐고 물어본다. 오 그것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상호작용을 통해서 내가 알고 있는 재즈 싱잉을 더 확장하고 전혀 다른 분야를 시도해보는 것도 고려해보게 된다.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지는 해봐야 안다고 굳게 믿는다. 김연아가 스트레칭하면서 무슨 생각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라고 말한 것처럼 그냥 해보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탐구해나가는 거다.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다. 세상의 모든 게 다 궁금하다. 세상을 알아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책이나 유튜브를 통해서, 전시회나 운동을 통해서도 있겠지만 역시나 가장 선호하는 채널은 사람이다. 대화를 통해서 사람과 벽을 조금씩 허물고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맘껏 하고 그 사람과 연결되는 것처럼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게 없다. 그래서 누구를 처음 만나도 이야기하는 데 스스럼없는 편이다.




모두가 나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단순히 외향, 내향을 떠나서 각자에게 방어막이 있다고 생각한다. 권투 선수들이 가드를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타인과의 원치 않는 상호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구축한 방어 시스템이다. 사람과 처음 만날 때는 이 시스템을 서서히 붕괴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내 입장에서는 "소통 비용"이다. 방어막의 두께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인데, 겉으로 매우 외향적인 것 같은 사람들도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는 경우가 있다. 왜 누군가랑 있으면 즐겁고 웃고 떠들고 했는데, 막상 생각해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나. 


많은 한국인은 두꺼운 방어 체계를 구축한 채 살아간다. 사회 전반에 타인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다. 안타깝고 씁쓸하지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개인 입장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라 생각한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말을 걸 때 남자들의 고전적으로 내세우는 전제가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라는 게 웃기면서 사뭇 씁쓸하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관계 맺기는 주로 맥락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이루어지곤 한다. 지연, 학연과 같은 고전적인 루트부터 요즘 유행하는 러닝 크루, 독서모임과 같은 각종 동호회가 그 예다. 그래서인지 생판 처음 보는 타인의 호의에는 조건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경계부터 하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목표가 하나 있다. 하루에 적어도 한 번은 낯선 이에게 조건 없는 작은 호의를 베풀기다. 음식점 사장님에게 얼마나 맛있는 식사였는지 과장되게 표현한다거나 문을 잡아주는 행위와 같이 말이다. 내가 이걸 매일 한다고 갑자기 모두가 타인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마음을 활짝 열리는 없겠지만, 이게 내가 우리 사회의 방어막을 한 꺼풀이라도 벗겨내기 위해 할 수 있는 행위다. 그리고 하다 보면 덩달아 기분도 좋아진다.




글을 쓰고 공유한지도 어느덧 2년이 지났다. 가끔 글을 보고 이렇게 물어오는 친구들이 있었다. "너를 불특정 다수에게 드러내는 게 망설여지진 않냐? 너를 그렇게 낱낱이 까발리는 게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처음 브런치를 시작할 때는 나도 그런 마음이 컸다. 스스로가 알려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인터넷에서 발가벗은 기분이랄까. 근데 사실 나는 발가벗고 있는 걸 좋아한다. "이게 본연의 나인걸."이라는 생각이 크다. 왼편 가슴에 작은 로고가 박힌 셔츠와 빳빳한 바지 안에 숨는 것보다는, 몸에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자유로움이 좋다. 누군가 나에 대해서 물어올 때도 나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솔직하고 투명하게 답한다. 어떠한 인식의 저항도 없이 있는 그대로 나를 보여주고 타인의 반작용을 역시나 저항 없이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그게 그냥 더 좋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좋으면 같이 놀고 아님 말어라는 마인드셋도 한몫한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회사 사람들도 있다. 물론 친한 소수이긴 하지만 말이다. 지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적이 몇 번 있다. 그로 인해 생략하게 되는 이야기나 디테일이 아쉬웠던 적도 있다.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과 숨기고자 하는 마음의 기나긴 전쟁 끝에 지금은 어떤 균형에 도달했다. 이제는 이 균형이 오히려 반갑다. 오히려 지인들로 인해 표현의 적절한 제약이 설정이 되어서 디테일보다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들은 생각보다 서로에게 큰 관심이 없다. 지인 중에서 이제 150개에 달하는 내 글을 하나하나 뜯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무엇보다 대부분 머뭇거리며, 아주 가끔씩은 고양되어 지인들이 내게 전달했던 피드백은 내게 언제나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그 의미가 새로운 글로 파생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노벨 문학상을 받을만한 대단한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일상적인 영감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족하다. 읽고 쓰는 사람은 갈수록 드물어져 간다. 사람들의 취미가 같지 않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내게 읽고 쓰는 행위는 가장 본질적인 취미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쓴 글을 읽고 "아 이 사람은 이렇게 사네. 나도 오랜만에 일기나 써볼까."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건 내게 너무나 멋진 일이다.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해준다면 가슴이 뭉클해져서 어쩔 줄을 모를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알고 타인과 생각을 주고 받기 위해 쓴다. 그로 인해서 삶이 더 재밌어질 수 있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도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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