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06
나는 항상 한 개의 노래에 꽂혀있다.
이런 식이다. 내 삶이 하나의 긴 소시지라 치자. 소시지의 한쪽 끝은 내가 들은 소리를 음악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나이(5살), 한쪽 끝은 현재다. 칼을 가지고 소시지를 자르면 단면이 노출된다. 그 단면은 살아온 삶의 특정 시점인 동시에 꽂혀있던 한 개의 노래이기도 하다.
기억나는 가장 오래된 노래는 윤도현밴드의 <사랑Two>이다. 밤길 도로를 달리는 대우 프린스의 뒷좌석에서 앞차의 빠알간 조명과 함께 노래를 처음 들었다. 그 시절 아버지께서 고른 카세트에 수록된 노래였다. 아버지는 썩 훌륭하진 않은 노래실력으로 멜로디에 맞춰 흥얼거리셨다. "아빠 이게 뭐야?"라고 물었더니 윤도현이라는 아저씨가 부른 <사랑Two>라는 노래란다. 3분 남짓하게 이어지는 소리를 '노래'로 처음 인식하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사랑Two>는 노래방에 가면 한 번은 부른다. 애초에 음정이 높지 않아서 부르기 어렵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노래만 부르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칼을 쬐금 더 오른쪽으로 가져온다. 1/5 정도면 되겠다. 10살, 뉴질랜드에 있을 때다. 한국에서 가져온 CD가 많지가 않았다. Puff Daddy, Celine Dion 정도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중에서도 밥 먹듯이 들었던 앨범은 셀린 디옹의 [All the Way... A Decade of Song & Video]이다. 수록된 노래들이 너무 좋아서 한 때는 매일 자기 전에 옆의 노트북에 켜놓고 자곤 했다. 멜로디가 윈도우 미디어 플레이어의 시각화 화면과 함께 춤추는 걸 보다, 듣다 잤다. 이때 눈 많이 나빠졌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아꼈던 노래는 <That's The Way It Is>와 <Beauty and the Beast>. <I'm Your Angel>,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도 CD가 닳도록 듣곤했다. <Power of Love>나 <My Heart Will Go On>은 너무 유명해서 아마 다들 아실거다. 사랑도 인생도 모르는 10살짜리 어린애가 왜 이토록 절절한 동시에 힘이 넘쳐흐르는 앨범에 빠졌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이후로도 노래는 언제나 내 삶과 함께했다. 중학생 때는 락이었다. 그린데이, Sum41으로 시작해서 Simple Plan, Keane, Franz Ferdinand, Good Charlotte 등등. 그 시절을 수놓았던 수많은 멋진 밴드들. 대학교 초반에는 홍대병에 걸렸다. 인디가 아닌 음악은 취급을 안 했더라지. 가을방학을 가장 좋아했다. 브로콜리너마저, 검정치마, 짙은, 언니네이발관은 아주 지겹도록 들어댔다. 교환학생을 시작으로 해외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EDM, 라틴, 테크노까지 커버리지가 넓어져 이제는 어지간한 음악은 다 좋아한다. 다만 힙합 중에서 돈 자랑이나 여성을 객체화하는 가사로 가득한 류의 노래나 가사가 잘 안 들릴 정도로 헤비한 메탈은 아직도 손이 잘 안 간다.
매번 꽂혀있는 음악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게 된다. 개별적으로 링크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내가 가장 선호하는 방식은 바로 카카오톡 프로필 뮤직이다. 어떤 노래가 자꾸 듣고 싶고 일정 수준 이상 머리에 계속해서 맴돌면 여지없이 "프로필 편집" 버튼을 눌러 노래를 업데이트한다. 30곡까지만 프로필 뮤직 지정이 가능해서 업데이트를 하나씩 할수록 오래된 노래가 차례로 지워지는 식이지만 뭐 그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결국 프로필 뮤직을 바꾸는 것은 전에 듣던 노래가 차츰 잊혀가고 다른 노래가 내 마음속에 깊이 들어올 때,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그 노래를 참지 못하고 "지금 나의 노래"로 선정하는 의식인 셈이다.
최근에 프로필 뮤직으로 선정한 노래 10곡을 추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백문이불여일청. 간단히 (지극히 주관적인) 설명도 달아드릴 예정이니 느낌이 온다면 한 번씩 들어보시길.
1. Dancing with my phone - HYBS
- 느린 템포와 흐느적이는 가사, 담백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노래. 토요일 오후,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조금 흥은 내고 싶을 때 들어보시길.
2. 사랑하는 이들에게 - 정재형
- 무도에 나와 유명해진 작곡가 정재형의 피아노 소곡.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노래가 매우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듣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조그만 물방울에 들어가 있는 기분을 자아내는 노래.
3. What's Up? - 4 Non Blondes
- 4명의 금발이 아닌 누나야들이 시원하게 불러제끼는 락이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시끄럽지 않고 특히 "Hey, yeah, yeah"파트는 음이 치솟으면서도 묘하게 평화로운 감정이 들게한다. 퇴근할 때 강추. (출근할 때 들으면 회사 가기 싫어질 것임)
4. It's Been a Long Long Time - Kitty Kallen
- 반백년도 더 된 재즈답게 꽤 긴 전주를 지나면 나긋한 보컬이 유려하게 이어지는 곡. 재즈에 익숙하지 않으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관심 있다면 "Long, long"할 때 분명히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임!
5. 봄처녀 - 선우정아
- 이 시대 최고의 보컬리스트 선우정아 납시오. 다른 감성적인 노래도 사랑하지만(특히 동거), "음, 음, 음음음"하며 흥을 절묘하게 돋우는 보컬의 실력에 감탄할 수밖에. 크게 할 거 없을 때 들으면 좋을 듯.
6. 젊은 우리 사랑 - 검정치마
- 오오~ 젊은 사랑 그것은~ 너무도 잔인한 걸. 아픈 사랑을 해봤다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가사로 채워진 노래. 내가 어떤 감정을 느껴도 휴일이형은 다 이해할 것만 같다. 검정치마 콘서트 언제 하나요!!
7. Everything Happens To Me - Chet Baker
- 재즈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쳇 베이커를 마다하는 사람은 여태 보지 못한 것 같소이다. 트럼펫과 보컬로 도달할 수 있는 부드러움의 극치. 티모티 샬라메가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이라는 영화에서 부른 버전도 참조(영화는 보지 마세요).
8. La vie en rose - Edith Piaff
- 말이 필요 없는 노래. 처음 보는 노래라고 생각하면 한 번 들어보세요. 바로 "아 이거" 할 것임. 프랑스 국가
9. Glad I Met Pat, Take 3 - Duke Jordan
- 수많은 듀크 형들에 비해서 조금 덜 알려진 듀크 조던 형님을 알게 된 곡. 뭐랄까 흰 눈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들으면 좋을 것 같은 노래. 이보다 더 친절한 설명이 있을 수가. 피아노를 좋아하면 한 번 들어봐요.
10. 'Round Midnight - Miles Davis
- SJ와도 항상 이야기하는 거지만 마일즈 데이비스가 트럼펫을 불면 연기가 자욱해지는 것만 같다. 특유의 매캐한 소리가 연기를 뚫고 나와 우리에게 말을 거는 듯한. 재즈에 익숙하지 않다면 비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