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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Sep 12. 2022

아이를 키우고 싶은가?

셀프 인터뷰 220912

현재로서는 아이를 기르고 싶지 않다.


이유가 다양해서 머리가 복잡해진다. 어떻게 쪼개 볼까.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나의 행복, 배우자의 행복 그리고 아이의 행복.


우선 나의 행복부터 생각해보자. 아이와 함께하는 나의 삶이 행복할까. 아이가 있는 하루를 상상해본다. 아이의 울음에 새벽에 깨고 기저귀를 간다. 젖병을 소독하고 내용물을 채운다. 애를 먹이느라 배가 고프다는 것도 잊고 만다. 우는 아이를 가슴에 안아 달랜다.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걸 지켜본다. 지난함도 피곤함도 잊은 채 아이가 사랑스럽다. 잠시 넋을 놓은 사이 다시 아이가 울기 시작한다. 육아를 해본 사람들의 경험담을 종합해보면 대충 하루가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뭐 아직 세상에 있지도 않은 아이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느낄지는 알 수가 없다. 삶의 많은 경우와 같이,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이 선택을 해야하는 셈이다. 아버지는 애 보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사회화를 거치지 않은 아이는 본능으로 가득하다. 인격의 성숙에 대해 유난히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초적인 행동들을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애가 하루빨리 크기를 바라면서 견뎌내야하는 세월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무엇보다 아이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시간들에 마음이 머문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 러닝, 수영, 자전거 라이딩, 글쓰기, 주말 오후의 여유로운 독서, 피아노 배우기,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회 보러 가기, 옛날 영화 찾아보기, 간만에 친구들과 술 한 잔까지 내가 즐기는 모든 것에 제한이 생긴다.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다고 가정할 때, 배우자와의 관계는 또 어떠한가. 사랑하는 사람과는 둘이서 함께하는 지극히 사소한 행위만으로도 쉽사리 충만해진다. 주말에 느지막이 일어나 슬리퍼를 질질 끌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서로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면서 깔깔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가 생기면 배우자는 교대 근무하는 동료가 된다. 아내가 쉬면 내가 아이를 맡아야 하고 내가 아이를 보지 않으면 아내가 아이를 짊어진다. 제로섬 게임 안에서 서로의 밑바닥을 보기 싫어도 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들 한다. 그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아이만 보고 살아가는 부부가 되어가는 거겠지.


배우자의 행복은 어떠한가. 앞서 묘사한 나의 행복과 많은 부분 유사할 것이다. 육아의 정신적, 육체적 고단함과 육아로 인한 수많은 기회비용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내는 출산을 한다는 점이다. 출산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는가. 가벼운 마음으로 틀었다가 받은 충격의 강도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결국 다 보지 못했다. 아이를 배는 40주와 출산은 한 사람의 몸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온다. 짧은 산후조리 기간이 끝나면 바로 육아라는 기나긴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평소에 몸을 꾸준히 단련해오지 않은 이상 신체가 무너져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다고 아이가 행복할까. 최근 발표된 0.75라는 출생률에서 예정된 천문학적인 부양비, 짙어져가는 미세먼지, 갈수록 병이 깊어지는 지구, 신냉전 시대 공급망 붕괴와 기록적인 물가 상승,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경쟁적인 교육 여건과 굳건한 청소년 자살률 순위,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아이를 한국에서 키운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열심히 일해서 아이를 외국에서 키우면 되지 않겠나 싶지만, 그 길은 또 다른 난제를 낳는다. 그 정도로 아이를 기르고 싶은 지도 의문이다. 결국 사람은 행복은 자신의 마음에 달려있다지만, 그것을 깨닫게 되기까지의 여정이 너무나 험난하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부모의 욕망이 아닌가 싶다. 아이가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낳기 전에는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또 모르지. 아주 밝은 아이가 태어나 웃는 얼굴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다닐지도. 나보다 더 시니컬한 아이가 나오면 어떡하지. 여하튼 아이의 기질이나 본성을 차치하고 환경만을 상정한다면 우호적이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여태 열거한 모든 합리적인 이유에도 불구하고 내 아이가 궁금하다. 어떻게 생겼을지, 어떤 성격일지, 어떤 말과 행동으로 본인의 시간을 보내고 나와 아내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보고싶다는 마음이 커져간다. 다분히 본능적이고 아이의 입장에서는 이기적일 수도 있다는 것 충분히 안다. 마음 앞에서는 이성적인 사고와 줄지은 이유들이 무력화되고 만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에 대한 나의 의견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아이에 대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한 번 끝까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아이와 상관없이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아직은 더 크다.


어디에선가 아이를 낳고 싶은지의 여부가 그 사람이 세상을 긍정하는지를 알려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과도한 단순화라고 생각했다. 어느샌가부터 처음 이 말에 대해 느꼈던 강한 반감이 점차 사라져 간다. 어쩌면 여태껏 살아온 나의 삶이 세상과 화해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사는 것이 즐겁다. 진심으로 하루하루에 감사하게 되었다. 언젠가 내가 기르게 될지도 모를 아이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시간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로 가득 차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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