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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Aug 24. 2022

지극히 평범한 어느 수요일

220824

수요일을 애정한다.


발음부터 예쁘다. 수요일. 화요일은 뭔가 활활 타오를 것 같고, 금요일은 딱딱하다. 수요일이 소리 냈을 때 가장 울림이 좋다. 사람 이름에도 "수"라는 음절이 들어가면 관심이 간다. 수현, 수연, 수정, 수림, 수진. 왜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이런 이름의 사람들은 예술을 업으로 할 것만 같다. 특히 수현이 맘에 들어서 한때 개명까지도 생각했다. 


수요일은 평일의 정중앙에 위치한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는 일주일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치지만 6시가 되면 일주일이 꺾이는 쾌감이 있다. 그래서인지 수요일에는 일이 잘 되는 편이다. 시간아 얼른 가라, 하면서 하나둘 씩 내 몫을 다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가 있다. 목요일 저녁은 금요일 퇴근과 너무 가까워 오히려 애가 탄다면 수요일 저녁은 주말과의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때문에 오히려 더 기대로 가득찬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오래간만에 일찍 일어났다. 알람도 없이 말이다. 설정되어 있던 알람을 끄고 밀린 빨래를 돌렸다. 얼마나 밀렸는지 세탁기에는 71분이 찍혔다. 대충 세수를 하고 짧은 바지와 민소매를 걸쳤다. 목이 긴 까만 나이키 양말을 신은 채 발을 러닝화에 집어넣었다. 간만에 한강을 달릴 셈이었다. 잠에 덜 깬 채로 현관 밖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갔다. 공동현관문을 열고 간단히 스트레칭을 했다. 몸을 아주 천천히 풀면서 빨리 뛰겠다는 생각을 떨쳐냈다. 그리고 뛰었다.



빨리 뛸 필요가 없었다. 호흡에 맞춰 발을 지면에 딛는 순간에만 집중했다. 호흡을 마실 때마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백여덟, 백아홉.. 그렇게 한없이 숫자를 세면서 자꾸 떨어지는 고개를 올곧게 치켜세웠다. 1km를 조금 넘어서 한강에 도착했다.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했다. 해도 없고 바람이 넉넉히 부는 것이 날씨가 어서 뛰어보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한없이 단순한 동작을 반복했다. 왼발. 오른발. 다시 왼발. 모든 에너지를 수평 이동에 사용한다. 수직 이동에 소요되는 에너지를 최소화한다는 느낌으로 팔을 휘둘렀다. 뛰다 보니 욕심이 났다. 발이 지면에 닿는 주기는 유지하되 조금 더 멀리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26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집에 돌아와 씻었다. 운동은 씻는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샤워가 주는 쾌감은 대단하다. 돌려놓은 빨래를 널고 옷을 입은 뒤 집을 나섰다. 오늘의 출근곡은 에디뜨 피아프의 <라비앙로즈>였다. 언제 들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곡이다. 괜히 발레리노마냥 몸을 한 바퀴 돌려본다.




9시 정각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자잘하게 할 일이 많은 하루였다. 오늘의 할 일을 적어둔 엑셀 스프레드시트를 열고 순서를 정한다. 갑자기 생기는 일은 소요시간을 기준으로 금방 할 수 있으면 바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후순위로 배정한다. 오늘의 메인 업무는 모집 공고 예정인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의 웹포스터와 공고문을 다듬는 작업이다. 창업 3년 미만 기업 중에서 해외진출 역량이 있는 스타트업이 우리 프로그램에 들어올 수 있도록 지원 혜택과 모집 일정을 다시 한번 수정한다. 총 8개를 뽑는데 이번에도 정말 해외로 나가고자하는 의지가 있는 대표님들을 만나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또 차주에 사회를 보게될 토크쇼의 홍보를 위해 촬영한 티저 영상을 이메일링한다. 토크쇼 스크립트 초안도 수정한다. 참가하는 연사 분들의 백그라운드를 조사한다. 그 외에도 밀고 들어오는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시계는 벌써 5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퇴근하고는 SJ를 만났다. 횡단보도 너머에 희미하게 그가 보였다. 하얀색 와이셔츠에 네이비 정장 바지를 입은 영락없는 직장인이었다. 전화를 해서 네 놈이 보인다고 했더니 버스 정류장 뒤로 숨는다. 이래도 자기가 보이냐면서 소리치는 친구에게 서둘러 뛰어가서 어깨동무를 한다. 하루 중에 가장 기분이 좋아진다. 할 일은 끝이 났고 이 형편없는 녀석과 맛있는 걸 먹고 조잘조잘 얘기할 일만 남았다.


닭도리탕을 아주 배부르게 먹고 카페에서 수정과를 마셨다. 법조계에서 일하는 SJ는 최근 국제기구에 관심이 생겼다. 마침 내가 교환학생 시절을 보냈던 헤이그에 국제사법재판소(ICJ),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있었다. 헤이그에서의 삶, 국제기구 커리어, 법조계 안에서도 어떤 전문성을 가져갈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이 친구랑 얘기하면서 알게 된 거지만 변호사라고 다 같은 변호사가 아니라 분야가 무척 다양하다. 자문/송무, 형사/민사의 구분부터 시작해서 주로 이혼을 다루는 가사, 살인 등 중범죄를 다루는 형사와 특허, 상표, 저작권 등을 취급하는 지식재산권까지 변호사가 파고들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SJ는 그중에서도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계속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는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ICJ나 특히 ICC를 간다고 가정했을 때 하게 될 일은 국내 복귀를 가정했을 때는 로컬 펌에서 하는 일과는 직무 관련성이 떨어져 보였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무엇보다 혼자 사무실을 차지하고 사건에 골몰하기보다 전 세계의 비슷한 일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했다. 한 때 내가 꿈꿨던 국제기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가장 친한 친구가 얘기하는 것도 재밌었다. 이미 꽤 많은 것을 이룬 그였지만 계속해서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날아가려는 그의 말과 손짓들이, 내 친구지만 꽤 섹시했다. 그가 앞으로 뭘 하든 나는 내 친구를 응원할 것이다.


그를 역까지 바래다주고 집으로 걸어 돌아왔다. 날이 무척이나 선선했다. 벌써 가을이 다가온 건가. 음악이 빠질 순 없지. 하루를 마무리하는 느낌으로 4 Non Blondes의 <What's Up?>을 들었다. "And I say Hey, yeah, yeah" 파트가 아주 시원시원한 노래다. 못 부르는 노래를 목청껏 불러제끼고 싶게 만드는 그런 류의 얼터니티브 락이다.


집에 도착해서 옷을 벗고 몸을 씻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에 무엇 하나 특별한 일이 없었다. 듣던 노래를 들었고 늘 보는 친구를 만났다. 하던 일을 했고 주로 뛰는 곳을 뛰었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하루가 충만하게 느껴졌다. 무엇 하나 더 바랄 게 없었다. 일상의 반복에 지루함을 느낄 법도 한데 말이다. 모든 건 변한다지만 오늘 하루는 작은 변화들 보다는 여지껏 살아온 삶과의 동질성이 더 크게 다가왔다. 결국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에 대한 안도감이 아니었을까. 대단치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 하루였다. 그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되었다.


여러분의 하루가 대단치 않아도 사랑스러웠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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