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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Jan 16. 2023

생일이면 재즈바에 간다

230115

살면서 가장 감미로운 생일 축하 연주를 들었다.


요즘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고등학교 친구 C와 대학교 친구 D와 함께다. 지난 8월부터 함께했으니, 벌써 함께한 지 반년이 다 되어간다. 공들여 만들어온 프로덕트는 이제 윤곽이 얼추 나왔다. 본격적으로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기 전 점검 회의를 하기 위해 우리는 석촌호수 옆에 있는 한 카페를 찾았다.


카페는 <Wicker Park>라는 곳이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로 번역이 되어 나온 영화의 원제와 이름이 같다. 영화는 <라빠르망>이라는 모니카 벨루치가 나오는 로맨스 영화의 할리우드 버전인데, 역시 원작을 따라가긴 버거워 보였다. 다만, 콜드플레이의 <Scientist>가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엔딩은 흐릿하게나마 기억이 난다. 두 영화 모두 주연배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무엇보다 내러티브가 로맨스 영화의 문법을 비껴나가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매력이 있다.


작고 아담한 카페 안에서 우리는 결국 서비스 오픈을 미루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난 몇 달간 작업해온 결과물을 빨리 세상에 내놓고 싶다는 열망은 우리 모두에게 있었지만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일까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더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보였다. 서비스는 두 축이 핵심인데, 한 개는 거의 완성이 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올해는 더 치열하게 서로 조금은 부딪치면서 치고 나가는 것으로 뜻을 모았다. 왜 더 하지 못했을까 후회도 되고 앞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회의였다. 모든 회의의 에너지가 오늘과 같다면 우리가 J-커브를 거릴 수 있을거란 희망이 생겼다.


딱딱한 이야기를 뒤로하고 송리단길의 어느 피자집으로 옮겼다. 얼마 전 생일이었던 나와 D를 위해 B가 풀코스로 준비했단다. 카페, 밥집, 술집까지 다 B가 손수 고른 곳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피자힙이라는 가게에서 가장 유명한 메뉴는 우대갈비피자였다. 립 400그람 정도를 통째로 구워 테이블에서 잘라 피자에 올려주는 방식이었다. 피자와 고기가 약간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바베큐 소스가 적절히 스며든 고기의 맛이 환상적이었다. 마침 아침에 필라테스와 턱걸이, 딥스, 스쿼트까지 끝내고 온 날이었다.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 고기를 먹을 때면 "오늘 운동을 얼마나 힘들게 했지?"라고 스스로 되뇌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오늘처럼 탈진 수준으로 운동을 마친 날에는 고기를 먹으면 모조리 다 근육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기를 먹었으니 이제 단백질 합성을 방해할 시간이다. 방이동에 있는 바티칸이라는 재즈바로 갔다.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었더니 은은한 붉은 조명과 클래식한 문양의 카펫 그리고 목조 바 테이블이 눈길을 끄는 바가 있었다. 오늘 첫 출근하셨다는 웨이터 분께서 B가 예약한 바 가장 뒤쪽의 분리된 공간의 소파 자리로 안내해 주셨다. 그분은 뭐든지 열심히 하겠다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피노누아와 멜론 프로슈토를 메모했다. 약간은 조심스럽게 생일 케이크를 해도 될지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매니저 분께 물어봤는데, 웃으시면서 접시를 가져다 주셨다. 게다가 생일자들의 이름도 적어가셨다. 오늘 연주할 트리오가 생일 축하 곡을 연주해줄 수 있을 것 같다며.


15분 남짓 기다렸을까. 가장 먼저 베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곤 조금 큰 키에 마르신 피아노, 마지막으로 색소폰이 무대에 올라 악기를 매만졌다. 잠시 악기를 튜닝하시더니, 리더인 듯한 색소폰 연주자가 무대 중앙에 서서 연주를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연주 시작 방식이다. 우린 음악인인 만큼 음악으로 인사드릴게요,라고 말을 건네오는 것만 같다. 첫 곡은 <Misty>였다. 첫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알았다. 내가 살면서 본 재즈 공연 중에 오늘이 최고가 되겠구나. 크지 않은 키의 여자가 본인의 상체만 한 색소폰을 연주할 때 잠시나마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한 호흡에 어떻게 저렇게 많은 감정을 담아낼 수 있을까. 처음에는 감미롭기만 하던 색소폰이 피아노, 베이스와 버무려지더니 점점 흥을 더해갔다. 듣는 이를 확 잡아당겼다가 놓아주고 이를 제 멋대로 반복하는 그런 연주였다.


Lily Kim 트리오는 재즈 스탠더드와 팝을 오가며 잊지 못할 밤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버릴 곡이 없었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생일 축하 곡이다. 살면서 누군가 내게 악기로 생일을 축하해준 적이 있을 리 없다. Lily님은 연주 시작 전에 나와 D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축하한다고 하시더니 이내 색소폰을 집어 들어 연주를 시작했다. 어떤 서두름도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연주였다. 무엇보다, 연주가 끝나고 난 뒤 Lily님이 하셨던 "2023년 한 해 원하시는 것 다 이루시길 바랄게요."라는 말이 우리 셋의 프로젝트에 축복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 말이 보이지 않는 어떤 막이 되어 우리 셋의 꿈을 감싸 안는 느낌이었달까. 뻔하디 뻔한 말이 상황에 따라서는 이토록 가슴 깊이 새겨지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막간에 우리는 케이크에 초를 켰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소원을 빌었다. 몇 천년간 아마도 수백억 사람들이 해왔을 이 의식이 유난히 특별하게 느껴지는 오늘이었다. 미리 준비한 D의 생일 선물을 꺼냈다. D는 고향이 경상도다. "뭔데? 뭔데?"를 연발하며 그녀는 포장지를 한 겹 한 겹 뜯었다. 우리는 선물한 그림을 선물했다. 갑자기 내가 그림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C는 본인의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며 작가님 한 분을 찾아왔다. 단정하고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선물을 그녀는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 


색소폰을 듣고 나니 노래가 하나 생각이 났다.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 말이다. 왜 인트로가 색소폰 연주로 시작되지 않나. 그래서 친구들과 코인 노래방으로 갔다. 첫 타자를 내가 끊었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흐느적이며 수십 년이 된 노래를 방이동의 한 구석에서 친구들과 함께 불렀다. 윤하, 성시경, god가 차례로 강림했다. 오랜만에 김건모도 출현했네. 엔딩은 우리 중 유일한 여성 분의 요청으로 인해 <내여자라니까>. 참고로 D는 막내다. 나와 하루 차이로 말이다.


맑은 영혼들과 함께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런 이들과 함께 일을 한다는 건 더 멋진 일이다. 서로에게 조금 더 가혹해질 것을 약속한 미팅부터 목이 쉬어라 노래를 불러젖힌 노래방까지. 이들과 함께해서 완벽한 하루였다.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각자의 뜻이 만나서 잠시 모였을 뿐이지만, 앞으로 이 만남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는 셋 다 모른다. 올해가 여러모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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